사우디에 '한양아파트'가 들어선 까닭…김아영의 새 이야기
" 1979년 10월, 2차 석유파동. 석윳값이 3배로 오르고 걸프 석유 회사는 한국에 30% 원유 수출 삭감을 통보했다. 국가 주도로 한국 건설회사들이 중동에 파견되었다. 당시 중동 건설 수주액은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 "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20분 영상에 작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김아영(46)의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이다. 서울 도산대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에서 선보인다. '구획, 방울, 퐁당'을 뜻하는 이 제목은 작가의 언어 유희다.
작가의 아버지가 부장으로 있던 한양건설도 중동의 여러 건설 사업을 수주한다. 그중 하나가 사우디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였던 알 마터 주택단지, 교민들은 이곳을 ‘한양아파트’라고 불렀다. 한국의 건설 인력 6000명은 숙소에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1000여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다 함께 국민체조로 일과를 시작했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밤 10시까지 일했다. 아파트 완공 후 9년 뒤인 1991년 걸프전이 터지고서야 사우디 정부가 미수급을 지급해 남은 인력이 귀국할 수 있었다. 9년 동안 비어 있던 아파트의 첫 입주자는 이라크의 침공으로 터전을 잃게 된 쿠웨이트 난민들이었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파트’라고 불리는 이유다.
배럴당 원유 가격과 기원전 2300년부터 현재까지의 사건을 한눈에 그린 인포그래픽으로 시작한 전시는 알 마터 주택단지의 평면도를 닮은 바닥, 녹아내리듯 매달린 이라크 전쟁 부호 설치와 영상으로 구성된다. 영상 ‘알 마터 플롯 1991’에는 아파트 건설에 참여한 아버지 동료들의 기억부터 이국의 소식과 작은 선물에 기뻐하던 어린 시절 작가의 꿈, 소중하게 모아둔 쿠웨이트로부터 온 우표들, 사우디 국왕이 신의 뜻에 따라 난민 1000가구를 수용한 사실을 전한 방송 클립, 걸프전에 참전한 군인의 소회, 확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사담 후세인의 비밀스러운 음성, 전망이 좋아 알 마터 아파트를 선택했다는 현지 주민의 인터뷰가 교차한다.
김아영은 올해 가장 뜨거운 한국 미술가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 5월 뉴욕에서 시상식을 연다. 한국 미술가로 첫 수상이다. 지난달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독일 첫 개인전을 열었고, 5월엔 런던 테이트 모던의 25주년 기념 소장품전에 참여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를 출품하는데, 그에게 세계 최대 미디어 아트상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최고상인 ‘골든 니카’상을 안긴 작품이다. 10월에는 홍콩 M+ 미술관 외벽에 영상을 선보인다. 11월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 분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뉴욕의 퍼포마 비엔날레에도 참여한다. 세계 주요 전시공간 어디선가 연중 내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코로나 시기 배달 노동자의 일상에 주목하면서 만든 영상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는 소멸한 줄 알았던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을 우연히 배달하면서 서로 다른 시간과 세계가 충돌한다는 애니메이션이다. 게임 엔진과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상 제작 방식이 주목을 끌며 ‘디지털 아티스트’‘혁신가’라는 해외 매체의 보도도 이어졌다. 그러나 김아영은 "실은 나는 아날로그적인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상상하는 작가"라며 "내 작업에서는 미래만큼 과거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바로 그 과거의 못다한 얘기다. 작가는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을 출품했다. 사운드 아트와 퍼포먼스 형태였던 이 작업을 10년 새 발달한 기술로 시각화할 수 있었다. 석유는 인류사에서 권력과 욕망의 매개였다. 오늘에도 그렇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트럼프의 가자 지구 개발 청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의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또 어떤가.
수상 소식과 전시가 이어지면서 어느 때보다도 바쁠 것 같은 작가는 “늘 같은 마음으로 종로 낙원상가 아파트의 작업실에서 살며 작업할 뿐이다. 좋은 기운과 마음이 모여 주목 받게 되는 시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안소연 디렉터는 “김아영은 한국의 낙원아파트에서 작업하는 로컬 작가이면서, 그 관심의 시공간은 고대에서 미래까지 광범위하다”며 ”예술적 상상력이 때론 출발점의 닻을 끊어버리고 연처럼 날아가 만화적 상상력이 될 수도 있지만, 현실에 대한 첨예한 비평의식을 갖고 있는 김아영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라고 말했다. 메종 에르메스나 미디어 아트보다는 낙원상가가 더 친숙할 세대에게도 관람을 권한다. 고단한 과거는 불가항력의 세계사의 일부였으며, 당신들이 가져다준 꿈을 양분 삼아 이러한 이야기가 탄생했기에. 6월 1일까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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