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식이만 훌륭한가? 애순이 인생 쨍쨍하게 해준 그녀들

윤일희 2025. 3. 2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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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속 여성들의 지지와 연대

[윤일희 기자]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넷플릭스
(*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탄핵 시국 우울증을 조금 달래고 있다.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인 1960년 당시 물질을 하며 소처럼 살았던 제주 여자들의 삶 자체야 울화가 치밀지만, 그 모진 삶을 살면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사랑을 발명하며 살아간 여자들의 서사는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진다.

드라마가 제시하는 시대배경인 1960년은 제주 4.3의 상처가 아물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상처를 싸매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은 "살민 살아진다"를 주문처럼 되뇌면서 살았다. 부락민의 대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남자들이 사라졌다. 그 사라진 사람들의 제사가 거의 한 날에 치러지는 마을에서도, 여자들은 그날의 아픔을 말하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제주 여자들의 의리

드라마에서 4.3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날의 한과 공포를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당시 제주의 엄혹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모·남편·아내·자식을 잃고도 살아야 했다. 살아남았기에 그래야만 했다. 학살과 전투로 남은 것이 없는 마을에서 살아갈 길은 상호부조밖에 없었다. 애순 부부가 세 들어 사는 주인집의 할망이 애순네 쌀독이 빌 때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곡식을 채워주는 마음이야말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굶어죽게 두지는 않겠다는 돌봄의 의지인 것이다.

드라마는 절대적으로 '이런 순애보가 있나' 싶은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의 로맨스가 큰 축이지만, 정작 내 마음을 붙든 건 제주 여자들의 삶에 대한 근성과 서로의 삶을 돌볼 줄 아는 의리였다.

마땅한 장비도 없이 바닷속으로 잠영해 들어가 갖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노동은 서로의 목숨에 큰 책임감을 가지며 임해야 하는 고위험 노동이다. 이들은 수십수백 번 숨을 놓칠 위기를 겪으며 바닷속에서 노동하는 물질로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부양했다. 어디 물질뿐인가. 집안일과 밭일까지 죄다 여자들의 몫이니, "제주서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게 낫다"는 말은 괜한 불평이 아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넷플릭스
이렇게 고되게 캐낸 해산물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물질로 살아갈 수 없는 병들거나 늙은 해녀들의 삶을 부조하는 데 공평하게 쓰인다. 혼자만의 노력만으론 상군의 해녀가 될 수 없다. 앞선 세대 해녀가 전수한 물질의 지혜, 바다 속에서 숨이 끊어질 생사의 위기를 함께 넘어온 공동의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애순 엄마 광례(엄혜란)와 물질을 함께 해 온 해녀들의 이 공동체 감각은 애순 엄마가 떠난 자리를 채워주며 애순의 든든한 지지자로 거듭난다. 첫사랑과 첫 야반도주를 한 애순을 헤프다 나무라지 않고, 애순과 도피 행각을 벌인 관식의 부모에게 은근한 압력을 행사한다. 가난으로 못 이룬 애순의 향학열부터 여성차별로 급장 선거에서 9표를 더 받고도 부급장에 머문 소녀 애순의 권력욕까지 모두 감싸고 인정한다.

마침내 이들은 화끈한 선거운동으로 중년 애순(문소리)을 마을 최초의 여성 어촌계장 자리에 세우고야 만다. 애순의 삶에 관식의 순애보만큼이나 이들의 지지와 인정과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가 말하는 "나름 쨍쨍한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애순 엄마가 죽고 엄마의 집에 남겨진 이복동생들은 '심성이 식모'인 애순의 차지가 된다. '한량' 행세하는 계부 병철(오정세)는 애초 아이들을 돌볼 마음이 없이 밖으로 나돌며 애순을 '식모'로 부리기 위해 대학 공부 시켜준다는 감언이설로 착취한다. 마침내 새 애인을 데리고 나타난 계부를 보자 애순은 약속이 공수표가 된 것을 확인하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녹록지 않은 세상, 금명이를 응원한다

애순이 쫓겨난 걸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해하던 계부의 애인 민옥(엄지원)은 살아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 여자아이가 부모도 없이 돈도 없이 혼자 양배추 농사를 지어 어린 동생들을 돌본 그 마음은 얼마나 웅숭깊은가. 민옥이 과거의 옹이졌던 마음을 미안해하며 애순에게 "난 너 존경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녀가 양심 있는 여자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주 여자의 낯을 세운다.

애순이 소녀 시절을 외롭고 고되게 보낸 집을 떠나게 된 민옥은 부채감을 떨칠 수 없다. "애순의 사춘기를 잡아먹은 값"이야 응당 애순 계부가 지불해야겠지만, 그가 그럴 위인이 아니다. 민옥은 애순의 초라한 신혼 셋방의 월세를 석 달 치 선불 대납한다. '도의적 장학금'이 '도희정 장학금'이 되면 어떻겠는가. 민옥의 양심이 '도의적'이면 되는 것이지.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넷플릭스
여자들의 지지와 연대 속에서 열심히 살아 어느덧 애순. 그러나 그토록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가난이 딸 금명(아이유, 1인2역)의 발목을 붙잡는다. 서울대에 떡하니 합격했어도 가난한 어부 부모는 떳떳한 대학생으로 살고자 하는 딸의 삶을 보조하지 못한다. 개천을 벗어날 수 없다면 개천 용이 무슨 영광이란 말인가. 결국 애순은 엄마의 영혼이 깃든 집을 판 돈으로 금명의 유학 비용을 댄다.

이건 분명 애순의 욕망이 금명에게 약간 비틀린 채 투사된 대리 만족임에 틀림없지만, 야단하기 망설여진다. 딸이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은 애순의 다짐처럼, 집 팔아 아들이 아닌 딸을 공부시킨 반란이 가부장의 관습을 '통쾌'하게 깨부수기 때문이다.

애순의 분투에도 출발선이 너무 다른 금명의 서울 생활은 부모의 희생을 복구할 만큼 그렇게 극적으로 반짝이지 못한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의 엄마는 결혼하고도 직장을 다니겠다는 금명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는다. 금명의 사회 인정 욕구를 '가난으로 비틀린 허영심'이라 모욕한다.

'개천 용' 금명은 저 무도한 예비 시모의 며느리가 돼 개천을 배신하게 될까. 남편은 끽해야 "시엄마 아들"이라는 해녀 이모들의 진리가 귓가에 어른댄다. 87학번 금명은 '개천 용'의 죄책감을 안은 채 어떻게 연애와 결혼을 통해 가부장 문화와 타협하게 될까. 자못 궁금하다.

딸은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은 애순의 1960년대를 지나, 똑순이 울보 금명이 마주하고 있는 1980년대는 '양성평등'조차 낯선 시대였다. 절대 녹록지 않은 세상이지만 금명이 펼칠 인생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금명이 파이팅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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