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의 시선] 한국 제조업의 실존적 위기
얼마 전 미 해군 군수지원함인 월리 쉬라호가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에서 보수 작업을 마치고 출항하는 사진이 보도됐다. 미국 내에서 유지·보수·정비(MRO)를 할 조선소가 부족하니 생긴 일이다. 앞으로 관련 법이 개정되면 미 해군의 신규 함정 건조도 맡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 2022년 한화그룹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대우조선 인수 계약을 할 당시만 해도 이런 성과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불행한 일이지만 한국 방산이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K9 자주포와 K2 전차 등이 유럽에 수출됐다. 가격 대비 성능이 좋고, 빠르게 납품할 수 있는 자유 진영 국가가 한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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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전기차·AI는 약진하는데
한국은 노사갈등에 반기업 입법
생산기반과 일자리 지킬 수 있나
」
하지만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군축을 하며 생산 라인을 줄였던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했다. K9 자주포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PzH2000을 만드는 방산업체 라인메탈이 실적 악화에 시달리는 폭스바겐 공장을 인수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폭스바겐도 방산 사업을 강화한다고 한다. 유럽이 자체 방산 역량을 강화하면 한국의 자리는 좁아질 수 있다.
체코 사업 수주로 잘 나갈 것 같았던 원전 수출도 브레이크가 걸린 모양새다. 걸림돌이 됐던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협상이 지난 1월 마무리됐지만, 한국수력원자력은 최근 네덜란드 원전 수주전에서 물러났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음달 2일 트럼프 행정부는 상호관세를 부과할 나라를 발표할 예정이다. 결과에 따라 한국 경제에도 태풍이 몰아닥칠 수 있다.
평화와 번영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경제 발전을 해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이런 환경이 더는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더 위협적이다. 독일 1위의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도 중국 전기차 공세에 휘청할 정도다. 전기차 전환이 너무 늦었고, BYD 같은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계속 성장하면서 중국 시장 점유율이 떨어져 생긴 일이다. 지난해 3월 독일의 슈피겔이 기사를 냈는데 제목이 ‘독일 자동차 산업의 실존적 위기’다.
한국은 주력 산업 상당수가 중국과 경쟁 관계다. 독일보다 더 심각하다. 제조업 전체가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BYD는 5분 충전으로 400㎞를 달릴 수 있는 기술을 선보였다. 반도체 등을 제외하면 중국 시장에서 팔리는 한국 제품은 이제 손꼽을 정도가 됐다. 미국의 견제 속에도 딥시크라는 인공지능(AI)까지 개발한 중국과의 경쟁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핵심 제조업은 좋은 일자리와도 직결된다. 한국은 대체 어떤 전략으로 지금의 제조업 기반을 지킬 것인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임원 세미나에서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경영진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사즉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 1위 기업이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기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일부 노조의 현실 인식은 크게 다른 것 같다. 현대제철은 영업이익이 급감했지만 노조가 현대차 수준의 성과급을 요구하며 노사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35만 대 생산까지 물가상승률 수준의 임금 인상만 하기로 합의하고 시작한 광주형 일자리 사업도 파업이 시작되며 존폐 기로에 섰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는 공멸을 부를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 시절엔 무모한 탈원전을 감행했고, 윤석열 정부는 연구·개발(R&D) 예산을 마구잡이로 삭감해 큰 혼란을 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일 이재용 회장을 만나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돼야 투자자도 잘살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의 주 52시간 예외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덕담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주주 충실 의무를 확대한 상법 개정안을 일방 통과시켰다. 불법파업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과 주 4일제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법과 정책들이 한국 제조업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추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기업의 핵심 기술 유출을 막는 것도 시급한데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현행 간첩법을 개정하는 일도 막혀 있다. 정치권, 기업, 노조가 동상이몽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겠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절박한 현실 인식부터 공유해야 한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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