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의 권한대행만도 못한 최상목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3. 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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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역대 대통령 권한대행과 비교해보니... 국민 눈치조차 안 보는 행태

[김종성 기자]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3.18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통령 권한대행보다는 '윤석열 권한대행'에 가깝다. 비상시국을 헌정질서에 맞게 이끌기보다는, 윤석열이라면 이랬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비친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지난 18일 방송통신위원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함으로써 지난해 12월 27일 취임 이래 '거부권 9회 행사'를 기록했다. '이 법이 나라에 필요한가'보다는 윤석열을 더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달 27일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마은혁 후보자를 최상목 대행이 임명하지 않는 것은 국회에 대한 권한 침해라고 결정했다. "재판관 중 3인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자를,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자를 임명한다"는 헌법 제111조 제3항을 어기는 헌법위반행위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최 대행은 국회의 선출권 행사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도 뭉개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즉시 임명해야 하는데도, 허송세월로 일관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라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최상목 자신의 버전으로 읽어주는 것만 같다.

보수세력을 살린 허정... 최상목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허정
ⓒ 위키미디어 공용
'화장'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될 때가 있다. 최상목 대행은 화장하는 척도 하지 않고 있다. 4·19시대를 산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는 화장하는 시늉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승만 정부에서 가장 문제적인 행정기관은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였다. 내무부는 1960년 3·15부정선거를 최일선에서 저질렀다. 자유당 정권의 경찰은 4·19 대통령관저 앞 시위 때 발포까지 자행했다. 그래서 이승만 하야성명(5.26) 이후의 권한대행체제 속에서 가장 크게 주목을 받은 곳은 내무부와 경찰이다.

민주당의 윤보선이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8일 전에 나온 그해 8월 4일 자 <동아일보> '공과, 과도정부는 무엇을 하였나? (상)'는 약 2개월여 간의 권한대행체제를 총평하면서 "표면적인 문제에 대한 화장을 그쳤을 뿐,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수술이 가해진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라고 평했다. 과도정부가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동시에, 일부 사안에 대한 개선을 통해 '표면적인 화장'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평이다.

하야성명 다음날인 4월 27일부터 대통령직을 대행한 허정 수석국무위원(외무장관)은 6월 15일 개헌으로 인해 민주당 출신인 곽상훈 민의원의장에게 대행직을 넘겨줬다. 새 헌법에 따라 참의원의장과 민의원의장이 각각 1·2순위 권한대행이 되고 참의원은 아직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원의장이 직을 맡게 됐다.

하지만 곽상훈은 '대통령직을 대행하면 조만간 있을 총선에 출마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8일 뒤 대행직을 떠났다. 이에 따라 3순위 대행권자인 허정 국무총리가 다시 대행이 됐다. 개헌 당시의 수석국무위원이 총리 선출 전까지 총리직을 수행한다는 개정헌법 부칙에 따라 허정이 총리가 되고 이를 근거로 다시 대통령대행이 됐다.

허정의 두 번째 대행직은 1순위권자인 참의원의장직에 백낙준이 취임하는 8월 8일까지 이어졌다. 이랬기 때문에 8월 4일에 나온 <동아일보> 총평 기사는 허정 대행에 대한 것이었다.

허정은 미국 시절 선생님인 이승만을 하와이로 빼돌려 국민들이 이승만을 형사법정에 세울 기회를 차단했다. 또 무효가 된 3·15 선거를 대체할 재선거를 신속히 치르기보다는 개헌정국을 먼저 띄워 시간을 끎으로써 제1공화국 청산을 지연시키고 자유당 사람들이 빠져나갈 틈을 만들었다.

그런데 허정의 국정운영은 스승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스승의 복귀 가능성을 차단했다. 옛 제자를 믿은 이승만은 단기 여행을 떠나는 줄 알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됐다. 그래서 허정 과도정부로 인해 실질적 이익을 본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집권 보수세력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주축인 자유당 인사들에 대한 처벌 근거가 6월 15일 개헌에 반영되지 못한 데는 허정 과도정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허정은 외형상으로는 4·19혁명의 대의를 존중하는 듯이 행동했다. 이것이 오로지 흉내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성과로 이어진 분야도 있다. 위 <동아일보>는 "경찰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안위원회를 둔다"는 조항이 정부조직법 제13조 제1항에 들어간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찰 중립화 조치는 경찰력에 의존했던 이승만 체제의 힘을 빼는 일이었다. 이처럼 민감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허정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법률 제552호로 발포된 정부조직법 개정법은 그의 재임 중인 7월 1일 공포됐다.

8월 5일과 6일에 실린 위 <동아일보> 시리즈의 중편과 하편까지 종합하면, 허정 체제하에서는 경찰의 태도가 예전보다 부드러워지고, 검찰이 구세력에 철퇴를 가하고, 재무부가 제한적으로나마 부정축재자의 세금 포탈을 조사하고, 농림부가 자유당과 결탁한 농협 세력에 타격을 가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근본적인 혁신은 아니었지만, 그런 조치들은 보수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역사발전의 관점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허정의 행동은 보수세력을 살리는 작용을 했다.

최상목 대행이 하는 일은 보수세력이 비상계엄 내란사태 이후의 새로운 정세에 연착륙하도록 돕기보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를 고수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윤석열의 길을 따르는 것은 보수를 위험에 내모는 일이다. 스승을 위하는 듯이 했지만 실은 보수를 살리는 데 주안점을 뒀던 허정과는 대비된다.

긴급조치 제9호 폐지하고,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한 최규하
 박정희 사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과 더불어 한국 독재의 양대 축인 박정희가 권좌에서 사라진 뒤에 최규하와 박충훈이라는 권한대행이 배출됐다. 박충훈 총리서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한 1980년 8월 16일부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그달 27일까지 대행직을 수행했다.

전두환의 첫 번째 임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당일부터 개시됐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16일부터 27일까지의 기간에 박충훈 대행이 국가지도자였다. 하지만 비상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이 실권자였기 때문에 박충훈 대행의 존재감은 낮았다. 그래서 박정희 피살로부터 전두환 취임까지의 과도기에 인상적인 궤적을 남긴 대행은 최규하 한 사람뿐이다.

최규하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대행직을 수행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한 달 보름 동안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군부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지만, 두 사람의 힘은 행정부를 휘어잡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행정부는 관료 집단의 리더인 신현확 부총리가 최규하 대행을 지탱하는 속에서 나름의 독자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 달 동안에는 권한대행이 운신의 폭을 가질 수 있었다.

허정과 달리 대통령이 죽은 상태에서 대행이 됐기 때문에 최규하는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눈치 볼 대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끄는 민주공화당, 구(舊)군부를 대표하는 정승화와 신군부(육사 11기 이하)를 대표하는 전두환, 박정희 집권기에 경제력을 축적한 여타의 보수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규하는 이 집단들의 이익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주에서 직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최상목 대행과 대비됐다. 대행 취임 보름 뒤인 11월 10일,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유신헌법에 대한 도전을 금지한 1975년 5월 13일의 긴급조치 제9호를 흔드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는 유신체제의 보루였다. 그런 긴급조치를 무력화시키는 헌법 개정을 언급한 그는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날인 12월 7일에 제9호를 폐지했다.

1979년 11월 28일 자 <매일경제> 1면 좌단에 따르면, 최규하는 운동권 학생들을 석방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현재 실무당국에서 검토 중에 있다"라고 답변했다. 또 박정희 정권의 피억압자들을 대표하는 김대중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취하더니 긴급조치가 해제된 12월 8일 0시부로 김대중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최규하 대행은 유신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민주화를 위한 가시적인 성과를 어느 정도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허정보다도 화장을 많이 한 대행이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권한대행들인 허정 및 최규하와 비교할 때, 최상목 대행은 권한대행제도의 취지를 살리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에 가깝다. 허정과 최규하는 비상상황을 새로운 정세에 접목시키는 일에서 제한적이나마 성과를 거뒀다. 이에 반해 최상목 대행은 그런 접목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제도의 파괴자에 가깝다. 국민들을 무서워한다면 허정이나 최규하처럼 화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건만, 그는 오로지 윤석열만 기억하며 '쌩얼'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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