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박은정의 직설 "윤석열과 검찰에 놀랐나? 아직 멀었다"

소중한 2025. 3. 19.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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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두 검사 ①] 그들이 말하는 12·3 내란과 검찰 정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 우린 그런 사람"

[소중한, 이정민 기자]

 서지현 전 검사와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이 17일 서울 마포구 오마이뉴스 서교동마당집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
두 검사 모두 의사를 꿈꿨다. 병을 앓았던 어머니를 위해, 몸이 약했던 본인 때문에 어린 서지현과 박은정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 검사로서 그런 일을 할 때 행복했다. 조영래 변호사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읽고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검사 박은정은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줬을 때" 보람을 느꼈다. 아버지에게 "배워서 남 줘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검사 서지현은 "진실을 알 수 있는 지혜와 정의롭게 판단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두 검사 모두 '검찰정권'에서 검찰을 떠나야 했다. 2018년 서지현의 미투와 2020년 박은정의 윤석열 감찰은 그들의 삶을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휘몰았다. 그것이 검찰을 살리는 길이라 믿었는데, 검찰은 두 검사를 죽이는 길을 택했다. 2022년(서지현), 2024년(박은정) 20년 넘게 일한 검찰을 떠난 뒤, 사람 살리는 일을 꿈으로 삼았던 두 사람은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눈다.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온 게 기적이다."

두 사람 모두 "당연한 결과", "예상한 파국"이라고 했다. '검사 대통령'이 2년 만에 저지른 내란에 그들의 답변은 단호했다. 서지현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따른 윤석열의 석방을 두고도 "사람들이 놀라는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며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앞으로 (검찰 때문에) 놀랄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검사,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과 서지현 전 검사를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오마이뉴스> 서교동마당집에서 만났다. 검사로서 꿈꿨던 삶, 내란 사태를 향한 분노와 부채 의식, 검찰의 구조적 문제와 암울한 현재, 그럼에도 마주하고 있는 희망 등을 두 사람은 2시간 동안 가감 없이 쏟아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 두 편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박은정이 본 미투, 서지현이 본 감찰
 조영래 변호사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읽고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검사 박은정은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줬을 때" 보람을 느꼈다.
ⓒ 이정민
- 두 분은 언제 처음 알게 됐나요?

서지현 : "언니 기억해요? 언니가 임신 중이었으니까. 그때가 몇 년도죠?"

박은정 : "2005년. 그때 여검사 워크숍?"

: "여검사 워크숍에서 처음 봤어요. 제가 2004년, 언니가 2000년에 검사가 됐고 그때만 해도 여검사 수가 많지 않을 때라 매년 여검사 워크숍을 했었어요. 워크숍 끝나고 노래방에 갔는데 언니가 임신해서 배가 진짜 이만했거든요. 너무 열정적으로 노사연의 <만남>을 부르는 걸 보고 '저 언니 얼굴은 인형 같은데 굉장히 열정적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 "기억이 안 나는데. 돌아가면서 다 부르는 분위기였을 거예요. 제가 나서서 노래를 불렀을 리가 없어요. 노래를 못하니까(웃음)."

- 그때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겠네요.

: "네. 지현이는 그 이후 일을 잘해서 여성 최초 특수부 검사가 됐죠. 그때 인터뷰 기사로 지현이를 봤어요. 너무 멋지다 생각했죠. 저희는 막판에 법무부에 함께 있었던 때 말고는 같이 근무해 본 적이 없어요."

- 2018년 서지현의 미투와 2020년 박은정의 감찰 당시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었나요.

: "2018년 미투를 보며 매우 충격적이었죠. 성폭력 피해뿐만 아니라 인사 불이익까지 있었잖아요. 당시 지현이가 제게 연락도 했었는데 제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했죠. 지현이 혼자 외롭게 싸웠던 거예요. 그렇지만 서지현의 힘은 대단했어요. 혼자 고립돼 싸우면서도 끝까지 버티며 모두의 관심을 이끌고 지지하게 만들었잖아요. 제가 항상 지현이에게 이야기해요. '너는 역사책에 나올 것'이라고. 그때 혼자 싸웠던 경험 때문에 윤석열을 감찰할 때 지현이가 유일한 제 편이 돼줬어요."

: "절박해 본 사람만이 그 절박함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미투 당시) 저는 검찰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고, 윤석열 감찰 당시 언니도 절박함에 부딪히고 있었거든요. 감찰 과정에 관여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 한 발 뺐어요. 실질적으로 감찰한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죠. 많은 분들이 저를 여성 인권만 얘기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미투 당시 출연한) JTBC 인터뷰를 보면, 인터뷰에 나선 첫 번째 이유로 검찰 개혁을 꼽았어요. 그토록 부패한 검찰은 반드시 개혁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제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죠.

하지만 검찰은 저를 음해했고 당시 청와대 등 정부 측은 그 음해를 믿었죠. 제 힘이 역부족이었던 거예요. 그러다 언니가 (윤석열을 감찰하며) 검찰을 개혁할 수 있는 국면에 앞장섰고, 저는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언니를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고 싶었죠."

검찰 떠나던 날

- '검찰정권'으로 불리는 윤석열 정부에서, 두 분은 검찰을 떠나야 했습니다. 검찰을 떠날 당시 심경을 떠올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 "조용히 개인의 삶을 살고 싶어 사표를 냈었어요. '검찰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할 일은 다 했다' 생각하고 낸 사표였죠. 그런데 검찰은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고 갑자기 징계를 통해 저를 해임했어요. 강제로 검찰을 나와야 했죠."

: "검찰은 2년 동안 언니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어요. 정상적으로 일할 수 없었고 압수수색 등 너무 큰 고통을 받았죠."

: "저는 직장생활 23년 동안 착실하게 일했어요. 되게 모범적인 공무원 스타일이거든요.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직 생활을 해임으로 마무리하게 돼 당황했어요. 부모님 뵐 면목도 없었고 매우 힘들었죠. 그래서 소송을 통해 다시 검찰로 돌아가 명예롭게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재 해임 취소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저는 윤석열 정권 출범 5일 만에, 한동훈 장관 취임 하루 전날 전화를 받았어요. 당시 법무부에 파견돼 디지털성범죄대응TF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기자에게 TF에서 만든 제안 법률 권고안 책자를 전달하고 설명한 직후였죠. 오후 4시쯤 법무부에서 전화가 와 '내일부터 성남지청으로 복귀하라'는데, 퇴근 2시간 전에 이런 통보를 하는 건 사표를 쓰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사표를 냈죠."

: "한동훈(이 법무부장관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잘라야 했던 거죠."

: "(검찰에서) 말도 안 되는 인사를 하는 건 나가라는 뜻이에요. 안 나가면 더 큰 모욕을 줄 거라는 협박이자 경고이기도 하죠. 사실 2018년 미투 때도 사표를 써놨었고 당시 법무부 최고위 간부가 저를 여러 번 불러 나가라고 압박했기 때문에 언제든 나갈 준비는 돼 있었어요.

하지만 TF 위원들 임기가 3개월 이상 남았었고 한창 논의 중인 게 많았어요. 제가 없어지면 TF가 해체되는 건 너무도 명백했죠. 실질적으로 활동한 8개월 동안 40여 회 회의를 열어 11개 권고안, 60여 개 조문 개정 방안을 쏟아낼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어요. 지난해 5월 딥페이크 사건이 터졌을 때 TF 해체 이후 어떤 전문적 논의나 연구가 없었던 것을 알고 놀랐어요.

서른 살에 검사가 돼 18년 동안 근무하고 퇴직했어요. 제 젊음과 열정, 인생 전부를 바친 검찰이었지만 솔직히 떠날 땐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어요. 여성 검사 최초로 특수부에 들어갈 만큼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항상 벽은 높았고 성폭력 피해 이후엔 숨쉬기 어려울 만큼 힘든 시간이 계속됐죠. 가끔 언니와 얘기해요. '우리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온 것이 기적이다'라고요."

: "저야 감찰이라는 직무를 하다가 공격을 받은 거지만 서지현은 피해자잖아요. 공격받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거죠. 저에 대한 공격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지현에 대한 공격은 폭력이죠."

: "언니에게 놀라운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미투 당일 간부급 여성 검사들이 제 인터뷰를 보고 '(서지현이) 뜨려고 거짓말하는 거다'라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검사들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죠. 그 검사들은 저와 한 번도 근무해 보지 않았어요. 저를 알지 못하는 검사들이었고, 그들 모두 성폭력 사건의 경우 여성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무고율이 극히 낮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일선에서 수사하는 검사들이 실체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런 편견을 갖는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어요."

"후회는 없지만"
 서지현 전 검사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선택하고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 언니(박은정 의원)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가장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게 그냥 우리니까요"라고 말했다.
ⓒ 이정민
- 두 분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 "저는 의사였어요."

: "저도요."

: "제가 몸이 약했거든요. 병을 고치는 의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죠. 그런데 문과 쪽이 맞아서 법대에 진학했고 조영래 변호사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읽으며 훌륭한 변호사가 되면 보람된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1998년에 사법연수원에 들어갔고 2000년에 임관했거든요. 당시 새내기 법조인들은 선배들로부터 '검찰 분위기가 이전 권위주의적인 정권보단 나을 거다', '약자·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검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 조언을 듣고 검사를 하게 됐죠."

: "8살 때 엄마가 대장암 수술을 하셨어요. 말기였기 때문에 항상 엄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죠. 엄마를 건강하게 해주고 싶어서 줄곧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겁이 많거든요. 피를 보는 게 제 성향에 안 맞더라고요. 아빠는 항상 '배워서 남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법조인이 되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검사시보 시절 제 지도 검사가 '검사는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도 그런 검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검사의 길을 결심했어요."

- 검사로 임관했을 때, 그리고 일하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요.

: "검사가 되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많이 말렸어요. 검찰 조직이 거칠고 권위적이란 이유에서였죠. 들어와 보니 정말 그러더라고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와 굉장히 심했던 술 문화 등 때문에 적응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도 업무 자체는 보람 있었어요.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검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더라고요. 형사부 검사로서 초기엔 한 달에 300~400건의 사건을 맡기도 했어요. 하나하나의 사건이 개개인에겐 크고 중요한 일이잖아요. 열심히 하다 보니 전문검사도 되고 상도 받았죠. 언론에 거창하게 오르내린 사건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수사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보람을 느꼈던 것 같아요."

: "검사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책임이 너무 막중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제 판단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 그 가족의 인생, 나아가 한 기업의 존폐나 정치적·국가적 상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사람들이 검찰에 와서 진실만을 말하지 않잖아요. 수많은 주장 속에서 진실을 찾는 작업이 너무 어려웠고, 검사 시절 매일 간절히 기도했어요. '제발 진실을 알 수 있는 지혜와 정의롭게 판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라'고요.

이 말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언니가 말했듯 사건 하나하나를 제대로 처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 제가 기도했던 때를 떠올렸어요. 검찰을 떠날 때 물론 홀가분했지만, 제가 검사로서 최선을 다했던 그때만큼은 행복했더라고요." (서 전 검사는 이 말을 하며 울먹였다 - 기자 말)

- 검사의 길을 걸으며 지금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셨을 텐데, 혹시 그간 해왔던 선택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으신지요.

: "윤석열 감찰은 '되는 감찰'이었어요. 비위가 명확했고 제 감찰의 절차도 위법하지 않았어요. 어느 정부에서든 감찰담당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저는 그냥 했던 거예요.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건 윤석열이었죠. 끊임없이 정쟁화하고 프레임을 짜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잖아요. 내란 이후 모습과 완전 똑같아요.

감찰담당관에겐 비공개 의무가 있어서 감찰 내용을 밖에 얘기하면 안 돼요. 그래서 그때 기자들 전화도 안 받았어요. 저쪽은 왜곡된 내용을 언론에 이야기하고 저는 언론 대응을 하지 못하니 완전히 밀려버렸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쉽죠. '나는 내 일을 했고 법원에서 판단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데, 정치와 언론을 너무 몰랐던 거예요. 지금 같으면 공익신고도 하고 방송에도 나가고 했을 텐데 그땐 '내가 틀리지 않았으니 법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선택하고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 언니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가장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게 그냥 우리니까요. 저도 언니처럼 너무 순수했던 면이 있어요. 검찰이 저를 그렇게 공격할지 몰랐거든요.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본 사람이 몇 명인데, 제 말을 왜곡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여성 최초 특수부 검사고, 장관상을 두 번 받고, 열두 번 우수사례 표창을 받았는데 일 못하는 검사로 몰아갈 줄도 몰랐고요. 제 방에 찾아온 검사·직원들과 차를 마시느라 하루에 1.8L 생수 10병을 쓸 정도였는데 저를 부적응자로 만들 줄도 몰랐어요.

더 힘들었던 건 언니·오빠·동생으로 지냈던 검사들이 한 순간에 다 등을 돌리고 허위로 진술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어요. 제 민형사 재판의 기록을 읽어보질 못할 정도였죠.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내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모든 기록에 직접 대응했다면 재판 결과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은 있죠."

"검찰, 쿠데타 가능한 시스템"
 "2019년 소위 '조국 사태' 때 제가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가 좌표에 찍혀 시달린 적이 있어요. 당시 그 글을 지웠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보아라 파국이다, 이것이 검찰이다. 거봐라 안 변한다, 알아라 이젠 부디. 거두라 그 기대를, 바꾸라 정치검찰'이라고 썼더라고요. 이때라도 문재인 정부가 제 말을 들었어야 해요."
ⓒ 이정민
- 헌정 이후 꾸준히 몸집을 불려 온 검찰은 결국 2022년 '검사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2년 반 만에 발생한 내란이었습니다. 검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균열을 내 온 두 분 입장에서 이러한 사태를 혹시 예상하셨는지요.

: "저와 서지현 모두 이런 파국을 예상했어요. 너무도 당연했죠. 왜냐면 윤석열이란 사람은 사적 이익을 위해 자신이 가진 권한을 남용하는 사람이거든요. 제 감찰의 내용도 '측근 한동훈의 비위를 가리기 위해 권한을 남용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잖아요. 경찰권도 갖고 있어요. 윤석열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무능을 덮고자 군 통수권이든 경찰권이든 남용할 것으로 예상했죠."

: "비상계엄 당시 '드디어 올 게 왔구나'라는 생각이었어요. 시간문제였죠. 사실 제가 처음 검찰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가 아니에요. (2013년) 국정원 댓글 공작 수사 때 국정원 파견 검사가 가짜 사무실과 서류를 만들어 증거를 조작하고 수사를 방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실이 2017년 알려졌는데) 너무 충격이었죠."

: "그래서 수사팀이 (가짜 사무실로) 압수수색을 가도록 했잖아요."

: "결국 그 검사가 수사를 받는 도중 자살했어요. 그런데 수많은 검사가 수사팀을 탓하며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그랬을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어요. 수백 개가 달렸을 거예요. 그때 처음 '나는 이 조직에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더해 2019년 소위 '조국 사태' 때 제가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가 좌표에 찍혀 시달린 적이 있어요. 당시 그 글을 지웠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보아라 파국이다, 이것이 검찰이다. 거봐라 안 변한다, 알아라 이젠 부디. 거두라 그 기대를, 바꾸라 정치검찰'이라고 썼더라고요. 이때라도 (문재인 정부가) 제 말을 들었어야 해요.

저는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과 지금껏 일면식도 없고 전화 한 통 해본 적 없어요. 미투 후 검찰 말만 믿었던 당시 정부에 좋은 감정을 갖지도 않고요. 그럼에도 그러한 글을 쓴 이유는 검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조 전 장관) 전 가족을 상대로 수사가 아닌 사냥과 도륙이 이뤄졌잖아요. 제가 초임 검사 때 사기 사건에 연루된 부부 모두를 구속하려고 했다가 부장님에게 엄청 혼이 난 적이 있어요. '법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 이 부부에게 아이는 있냐. 구속되면 애를 키워줄 사람은 있냐. 어떻게 검사란 사람이 부부 둘을 모두 구속하려고 하느냐'면서요.

이후 저는 그렇게 알고 검사 생활을 해왔어요. 저는 (조국 사태에서도) 검사들이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근데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라며 응원하고 있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데도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너무도 위험한 조직인 거죠. 그런 검찰을 그대로 뒀고 '검찰정권'이 창출됐어요. 그 결과는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

- 대한민국을 대혼돈으로 내몬 현 사태는 윤석열 개인을 넘어 그를 내란 우두머리로 키운 검찰이란 배경이 있었을 텐데요.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 "검찰은 너무도 비대한 권력을 갖고 있죠. 70년 동안 수사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공소취소권, 수사종결권 등 너무 많은 권한을 다 갖고 있는 조직이었어요. 또한 그 권한을 일사불란하게 행사해 왔고 그 정점에 윤석열이 있었던 거죠. 모든 권한을 윤석열 혼자 행사할 수 있던 구조였잖아요. 검찰은 쿠데타가 가능한 시스템이에요."

: "과거엔 군대였다면 지금은 검찰인 거죠."

: "저는 그것이 조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그 검찰권으로 마침내 대통령 권력도 쥐게 됐고, 독버섯처럼 곳곳에 숨어 있던 정치군인들을 모은 것이죠. 검찰 권한을 분산해야 이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윤석열 구속 취소 후 검찰이 즉시항고를 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더라고요. 저는 '놀라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국민은 아직 검찰을 너무 모릅니다. 그리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고요. 앞으로 놀랄 일이 훨씬 더 많을 거예요. 검찰이 즉시항고를 하지 않은 것은 탄핵이 기각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고, 내란에 검찰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계엄을 선포하고 입만 열면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너무도 태연하게 하는 윤석열을 보며 놀라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너무 익숙했습니다. 검찰 내에서 많이 본 모습이거든요.

한 후배가 '이 조직은 모두 출세에 미친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많은 검사들이 국회의원을 꿈꾸는지 너무 희한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법 위에 군림하며 절대권력을 누린 검사들에게, 지켜야 할 것은 법과 원칙이 아닌 권력자와 그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검찰 조직이 튼튼해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게 많아지므로 조직을 지키는 겁니다. 실제론 조직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지키려는 거죠. 수사, 기소, 형집행 등 매우 중요한 권한을 가진 조직의 구성원들이 공적 자세를 상실한 채 권력만을 추구한다면 그 조직과 그 조직이 만들어 내는 것이 괴물 아니면 무엇일까요."

- <[인터뷰②] 두 검사의 사과 "국민에 침 뱉은 검찰, 이젠 속내도 안 감춰">으로 이어집니다.

▣ 제보를 받습니다
오마이뉴스가 12.3 윤석열 내란사태와 관련한 제보를 받습니다. 내란 계획과 실행을 목격한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https://omn.kr/jebo) 제보자의 신원은 철저히 보호되며, 제보 내용은 내란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만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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