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지켜내고 싶어서, 사비 2억 털어 다큐 만든 감독
[이선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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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를 연출한 유수연 감독. |
ⓒ 시네마달 |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수연 감독도 영화와 닮아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 보유자로 등록돼 있는 조영숙 선생이 사비를 털어 여성국극 무대를 마련했듯, 감독 또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사비 2억여 원을 투입했다고 한다. 국가에서 보존을 위해 지원하면 좋겠지만, 판소리나 전통 무용 등에 비할 때 여성국극 제반 상황은 여전히 황무지와도 같다. "아무도 기록하려 하지 않아서 내가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며 유수연 감독은 기획 당시 초심부터 전했다.
무모한 도전에 감동하다
앞서 1세대·2세대 여성국극 배우들의 현재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이 2013년 개봉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영화는 1800여 명이 봤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 밖에 있었다. 10여 년이 지나 웹툰과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유수연 감독의 다큐로 소환된 여성국극은 이젠 제법 친근해 보인다.
유수연 감독의 접근법은 좀 달랐다. 정의진 명창을 소재로 한 다큐 <수궁>(2023) 촬영 당시 알게 된 조영숙 선생과 그의 제자를 통해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1년 4개월 간의 촬영을 거쳐 지금의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사실 제 기본 근간은 극영화였고 다큐멘터리를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수궁> 때는 나 혼자 열심히 하면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겁 없이 뛰어들었다가 된통 혼났다. 그런데 극영화와 달리 다큐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힘이 있더라. <수궁>의 정의진 선생은 소리를 그만두신 지 26년째였는데 조영숙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무대에 서신 경우였다.
그 모습에서 제 과거가 생각났다. 본래 제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영화가 좋아 연출을 복수 전공했는데, 극영화를 준비하다 잘 안됐고 결혼하며 6년간 경력단절이 있었다. 정의진 선생님을 보며 다시 시작하는 힘을 생각하게 됐고, 영화로 담아 많은분들과 희망을 나누고 싶었다. 사실 국악 다큐는 돈이 되지 않기에 소재로는 최악인데, 아무도 안하려 하니 내가 하자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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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를 연출한 유수연 감독. |
ⓒ 시네마달 |
영화는 이 두 사람이 조영숙 선생을 비롯 1세대·2세대 여성국극 장인들을 모아 <레전드 춘향전>이라는 새로운 여성국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이 주요하게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걸 지켜본 유수연 감독의 생각이 궁금했다.
"정의진 선생을 아깝게 생각했던 조영숙 선생님이 네 번 정도 설득했다더라. 두 분 공통점이 전라도 출신 소리꾼이라는 이유로 온갖 설움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조영숙 선생님 같은 경우는 여성국극을 못하게 됐을 때 밤무대와 요정에서 공연하고 낮엔 보험일을 하며 돈을 모으셨다. 그 돈으로 여성국극을 기획하는 데 쓰셨다. 그때 정의진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들었다. 무대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여성국극을 올리겠다는 의지가 강하셨다.
박수빈·황지영씨가 그 정신을 이어받았더라. 제가 봤을 때 어떤 명맥을 잇겠다는 생각보단 여성국극이 없어진다면 그들의 존재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마음 같았다. 조영숙 선생님처럼 두 사람도 많은 행사를 뛰면서 돈을 모았고 마지막일지라도 제대로 한번 여성국극을 해보겠다고 기획한 게 <레전드 춘향전>이었다."
물론 남모를 어려움도 두 배우에게 있었다. 장르 특성상 여역보다 남역을 더 높게 쳐주는 여성국극 특유의 특징 때문에 황지영씨는 일종의 외로움도 견뎌야 했다. 영화에선 그의 외모를 두고 살을 빼야 한다는 주변 선배 배우들의 타박 장면도 여과 없이 나온다. 유수연 감독은 사비를 털고 공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박수빈씨, 마음의 상처를 안으면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해온 황지영씨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수빈씨는 사실 판소리를 15분 부르고 가면 150만 원은 거뜬히 받는다. 충분히 소리계에서 더 클 수 있는데 본인이 의상·소품 다 준비하고 캠핑카를 끌고 다니며 여성국극을 하는 게 처음엔 이해가 안 되더라.
지영씨는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국악고를 나왔고 대학도 수석으로 입학했다. JTBC <풍류대장>이란 프로에서 3등을 하기도 했고. 근데 조영숙 선생님, 박수빈씨에 대한 사랑과 본인이 섰던 무대에 대한 감동이 큰 것 같았다.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픈 마음이 강해 보였다. 수빈씨에겐 무대가 그의 삶 전부이고, 지영씨에겐 사랑을 지키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국극의 진면모를 체감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 번의 위기의 순간이 있다. 공연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려 동분서주하는 박수빈씨 모습에서부터 세대가 다르고 개성 다른 여성국극 선배들 간 미묘하게 벌어지는 신경전 등이 그렇다. 감독은 애써 그 갈등 요소를 담담하게 화면에 담았다.
"다큐가 재밌는 게 오늘 촬영에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데 있더라. 그 즉흥성이 제겐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너무 강한 갈등은 좀 덜어낸 부분도 있긴 하다. 선생님들께서 각자 자기가 원조라고 하실 때 수빈씨나 지영씨가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레전드 춘향전>에 대한 이견 때문인데, 그래도 그 와중에 조금씩 지금 시대에 맞게 파격을 시도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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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를 연출한 유수연 감독. |
ⓒ 시네마달 |
영화에서도 박수빈씨가 일본에서 화려한 다카라즈카(일본 여성 극단) 공연을 보며 수심에 잠기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대형 철도회사가 후원하는 다카라즈카, 그리고 국가에서 후원하는 중국의 월극, 대만의 가자이 같은 여성극에 비해 한국의 여성국극 현실은 초라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정말 자료가 없더라. 불과 60-70년 전인데 이 정도로 자료가 안 남아 있는 건 의도적으로 지웠다는 걸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라. 여성국극이 주류 질서를 해체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한번도 주류인 적은 없다.
다만 비주류였던 당시 상류층들이 공연을 보러 오게 만들었고,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던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으로 돈을 벌었으며, 전쟁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시기를 거치면서도 문화로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다시 이런 일이 나올 수 있을까. 그걸 잊지 못하며 이어가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걸 겪은 적 없는데도 상상만으로 지키려는 사람들이 위대한 것 같다.
이건 정확히 확인된 건 아니지만 1950년대 2천 석 규모의 극장 공연은 분명 촬영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당시 기록하던 사람을 변태 취급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1950년대 이후 국가가 한국영화를 부흥시키면서다. 극장에 영화를 틀게 하고 여성국극은 못 올리게 하면서 점점 외곽, 지방으로 밀려갔다.
1960년대 후반엔 천막에서 공연하고 그랬다더라. 그리고 요정이나 밤무대에 나가는 배우들이 늘어갔고. 나중에 여성국극 배우 60명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갔는데 거기서 명절마다 모여 본인들 사진을 불태우는 의식을 했다더라. 누군가가 그걸 조금이라도 남겼다면 영원히 그 기록이 이어질 수 있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이런 이유로 유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빠른 시일에 완성하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여성국극 가다끼(악역) 전문 이소자 선생과 책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소자 선생은 여성국극 배우들 수십 명이 함께 무대에 있는 단체 사진을 감독에게 제공하기도 했다고. 의외로 무대 위에서 여성국극 배우들이 단체로 공연하는 사진 자료 또한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유수연 감독은 박수빈씨가 대표로 있는 여성국극제작소의 오디션 소식도 전했다. 지난해 안산문화재단 상주단체로 선정된 이곳은 지난해 1기 오디션을 진행해 10명의 배우를 선발했고, 오는 4월 11일까지 2기 오디션 지원 접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에 <대춘향전>을 준비 중이다. 1천석 규모로 진행한다는데 1950년도 이후 처음으로 대공연장에서 하는 셈이다. 드디어 여성국극 원형을 복원할 공간이 생긴 셈이다. <레전드 춘향전> 때도 600석이었다. 30명 가까이 한 무대에서 올라갈 수 있으니 그 원형을 접하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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