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사라진 약혼자 쫓는 여성, 세계 일주하다 깨달은 건...

김상목 2025. 3. 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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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그랜드 투어>

[김상목 기자]

 <그랜드 투어> 스틸
ⓒ M&M 인터내셔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1918년 초, 영국의 식민지로 머물던 버마 랑군(현 미얀마 양곤) 부두에 한 백인 남자가 꽃을 든 채 서성거린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행정당국에서 공무원으로 재임 중인 '에드워드'다. 그는 꽃을 든 채 주변을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린다. 뭔가에 쫓기는 행색이던 그는 공무 수행을 핑계로 항구에서 출항하는 싱가포르행 배에 오른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다시 급히 이동한다. 에드워드는 정말 '여왕 폐하의 스파이', 비밀정보기관 요원인 걸까?

에드워드가 버마를 떠나자마자 한 명의 백인 여성이 랑군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몰리', 에드워드의 약혼자다. 두 사람이 결혼을 예정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약혼자를 찾아온 것이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해 끝없는 도피 행각을 거듭하고, 몰리는 질세라 필사적으로 약혼자를 추격한다. 이만하면 포기할 것이라 믿고 한숨 돌리면 어느새 에드워드가 묵는 숙소로 약혼녀의 전보가 도착한다. 둘 중 하나가 포기해야 끝이 날 판이다.

여행은 덕분에 무한히 연장된다. 서로 간발의 차로 계속 엇갈리며 둘은 서로의 흔적을 확인하고 필사적으로 쫓고 쫓긴다. 버마 랑군에서 출발한 여정은 싱가포르에서 방콕을 지나 베트남 사이공,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하이를 차례로 경유한다. 마침내 백인이라곤 찾기 힘든 양쯔강 상류 오지, 티베트의 접경까지 기이한 추격전은 이어진다. 오직 연인을 찾고자, 혹은 달아나고자. 과연 둘의 장구한 여정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기묘한 전복과 변주를 감행하다
 <그랜드 투어> 스틸
ⓒ M&M 인터내셔널
영화의 제목이자 줄거리를 압축하는 '그랜드 투어', 고급 자동차 이름인 '그란 투리스모'가 본래 어원이다. 처음에는 근세 초입에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당시 선진 문물로 알려진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지로 2-3년 동안 장거리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던 유행을 지칭한 단어다. 유럽이 안정을 찾고 번영을 구가하면서 이 장기간 여행 또한 확대를 거듭한다. 서구 열강의 전성기인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신비한 동양의 풍광을 쫓아서 여러 대륙을 주유하는 규모로 확장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테다.

포르투갈의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 미겔 고메스의 신작은 바로 그런 '그랜드 투어'를 기묘한 방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부류의 모험소설에서 벌이는 이 장대한 여정은 대개 인류의 진보와 문명의 개화를 증명하는 도전으로 묘사되곤 한다.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이 가능할 만큼 교통수단이 확보되고, 강대국에 의한 치안 확보도 가능해진 세계, 거기에 장기간 여행을 감당할 재력과 여유가 확보된 부유하고 교양 있는 여행자의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필리어스 포그처럼 노동하지 않고도 몇 개월의 여정을 돈을 뿌려가며 소화할 수 있는 유한계급 신사 모험가들이 이런 '그랜드 투어'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 속 주인공들의 여행 동기는 그런 서구중심주의의 대의명분과는 동떨어진다. 에드워드가 벌이는 거대한 여정의 이유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공직자가 책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 물론, 약혼자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공황 상태로 보일 뿐이다. 그는 명백히 우울증에 빠져 있지만, 딱히 그 원인도 설명되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집요하게 따라붙은 약혼녀를 피하고자 미지의 세계를 파고들 뿐이다. 마치 숨을 수 있다면 더 깊숙한 오지로 파고들려 하는 게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유일한 일관성이다.

그런 산만한 동기와 모호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낯선 여행은 충분히 흥미로운 광경을 선사한다. 한 세기 전이지만 아득한 과거의 역사처럼 생경한 제국주의 식민지의 풍경이 화면 가득하게 재현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서양 백인들은 상류층을 이루고 동양인을 하인으로 부리거나 시중을 받는다. 여객선 선상 만찬에서 백인 여행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인종차별적 언사를 내뱉고,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의 원천인 식민지에 대해 비하를 주저하지 않는다. 요즘 같으면 당장 발끈해서 멱살 붙들고 시비가 벌어지거나 봉변당하기 딱 좋은 내용이다.

한편으론 자신들의 지식과 세계관으론 이해하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타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표현하거나 조화를 이루려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현지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갈등을 줄이고픈 이들도, 동양의 신비에서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이들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에드워드 역시 불교 사원에서 그런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아편에 찌든 영국 영사가 토로하듯, 지금 당장은 번영하며 영속될 듯하지만 '제국의 종말'은 머지않았다. 영화의 시대 배경을 왜 굳이 1918년으로 설정했을까? 서구 열강이 자기들끼리 더 많은 이권을 탐하다 자멸로 향하는 첫 단계, 1차 세계대전의 파국이 끝나가던 시절이다. 감독이 노리고 설정한 게 아니라면 더 이상할 노릇이다.

에드워드의 기이한 모험은 서구의 3세계 침략 초창기 정복자들이 겪던 모순과 겹친다.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아마존 밀림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던 반란자 아귀레의 파국처럼, 에드워드 역시 식민 지배 말단 일원으로 먼 외국에서 풍족한 물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을 반복한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보여준, 전쟁과 제국주의 광기 속에서 자멸하는 커츠 대령과 미군들의 초상을 예언하는 듯하다. 마침 코폴라 영화의 원작인 조지프 콘래드 소설 <암흑의 핵심> 배경도 <그랜드 투어>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다.

같은 여행이지만 행위자 따라 재해석되는 변주
 <그랜드 투어> 스틸
ⓒ M&M 인터내셔널
전반부는 에드워드가 약혼녀를 피해 달아나는 여정이다. 여기까진 좀 특이한 '그랜드 투어' 형태에 머문다. 하지만 후반부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이한 변주다. 에드워드를 쫓던 몰리가 약혼자의 여정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초반에는 그저 과거 식민제국 공무원 백인 남성의 모험을 재현하는 뜬금포에 당황스럽지만, 중반 이후 변주 과정이 이야기를 전대미문의 층위로 이끈다.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대체 왜 서양 제국주의 로망을 굳이 시대착오적으로 복원하는지 이유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후반 대비를 통해 주인공 성별을 전환하는 과정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랜드 투어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고찰해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여럿 발견된다. 일단 근대 초입에 유럽 대륙과 지중해 권역을 배경으로 행하던 여행은 왕가나 귀족 등 최상류층 전유물에 가까웠다. 이들은 혈연으로 묶인 친척과 교류하거나 정치·외교 수업을 쌓는 사교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던 게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영으로 중산층이 늘면서 범위와 성격이 확대된다. 19세기 이후 서양의 우위와 함께 경제적 이익을 좇고, 견문을 넓히는 예비 관료와 기업가 양성 과정이자 여행 산업이 대두한 것이다. 현지에 적응해 교류할 필요 없이 그저 선택적으로 경탄하고 신기해하는 한계를 유지한 채 규모만 커진다.

그런데도 예전과 비교해 다양한 이들에게 개방된 문턱은 많은 파생 효과를 낳았다. 20세기 초반 유독 서양 중산층 여성 여행자들이 세계 일주를 감행하고 여행기를 남긴 변화는 바로 서구 여성 인권 확대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몰리의 여정은 그런 시대상의 투영인 셈이다. 여전히 남성보다 위험한 것투성이지만, 주체적인 의지로 험난한 여정을 주파할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고, 나머지는 개인의 의지와 여력으로 감당하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물론 정작 약혼녀의 여행은 낭만적 로망이나 지적 탐구와는 동떨어진 목적이긴 하지만.

역사적 성찰을 영화 미학 실험으로
 <그랜드 투어> 스틸
ⓒ M&M 인터내셔널
대륙과 바다를 넘나드는 거대한 로드 무비로 구현된 <그랜드 투어>는 대하 로드무비의 눈요깃감을 기대한 관객을 또 한 번 당혹하게 만든다. 분명히 20세기 초반의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데, 화면에는 휴대전화와 오토바이가 당당히 등장하고 21세기의 도시와 항구가 떠억하니 전시된다. 대관절 이게 무슨 기행이란 말인가.

영화의 절반은 실내 세트장에서 20세기 초 풍경을 미니어처 형태로 복원하는 촬영으로, 나머지는 감독과 스태프가 직접 방문해 촬영한 21세기 현실의 풍경으로 나뉜다. 제작진은 천연덕스럽게 두 부분을 병치하며 오가는 식으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이는 뜬금없어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전개다. 황당한 심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관객에게 영화의 함의를 여러 형태로 다시 조립할 재량을 부여한다. 흥미로운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관객 각자 품은 지식과 관점,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로 이야기에 대한 시각을 결정하고 본인만의 영화로 규정하는 과정이 뒤를 잇는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흑백 화면은 시대 배경을 재연하는 이미지 조성과 함께 화면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의도한다. 인물의 표정이 클로즈업될 땐 고전 무성영화 질감으로 이미지에 집중하고, 동양의 과장된 이미지는 상징적 암시와 함께 그 시절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을 간접 경험하게 만든다. 기묘한 이질감과 부정합이 향연을 이루며 불친절하긴 해도 긴장을 놓지 못하도록 밀고 당기는 영구적 운동을 전개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와 <암흑의 핵심>, 서구 제국주의의 진보와 번영 vs. 혼란과 쇠락을 상징하는 양대 고전을 합쳐서 둘로 나눈다면,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가 물과 기름처럼 만나 화학적 혼합을 이룬다면 튀어나올 법한 영화다. 아마 한 번 봐서는 감독의 비전을 온전히 소화하긴 힘들 테다. 두 주인공이 보여주듯, '끝없는 열정'과 '무한한 슬픔'이 한데 깃든 <그랜드 투어>에는 마지막 트릭이 하나 숨어 있다. 과연 우리가 영화를 보는 걸까, 영화가 우리를 보는 걸까, 또는 에드워드와 몰리의 끝없는 여행은 누구에게 전시되는 걸까? 이 영화를 매개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지적 모험의 끝에 그 해답이 기다릴 테다.
 <그랜드 투어> 스틸
ⓒ M&M 인터내셔널
<작품정보>

그랜드 투어
Grand Tour
2024|포르투갈|드라마, 역사, 모험
2025.03.26. 개봉|129분|12세 관람가
감독 미겔 고메스
출연 크리스티나 알파이아테, 곤칼로 와딩톤, 클라우디오 다 실바, 랭 케 트란
수입/배급 M&M 인터내셔널

2024 77회 칸영화제 감독상
 <그랜드 투어>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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