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의 사이언스&] 특허 소송 제기되면 50% 무효 판결, 한국은 특허 강국인가
‘세계 4위 특허강국.’ 특허청이 우리나라 특허의 세계적 위상을 얘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인용한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통계만 보면 그렇다. ‘국제특허출원(IPO) 수 세계 4위, 국내총생산(GDP) 대비 특허출원 세계 1위’. 5위권 내에서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미국·일본·독일의 출원량이 모두 감소 추세라는 통계도 발표됐다. ‘국뽕’이 차오를 만하다.
특허는 산업의 미래다. 연구·개발(R&D)의 결과물인 특허기술이 신산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기술의 배타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게 특허제도다. 이런 특허 통계를 보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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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허출원명세서 작성부터 부실
정부의 물량 중시 평가도 문제
부실 특허, 기업 저평가로 이어져
국제특허출원 세계 4위 무색
」
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그간 나라를 먹여 살려온 스마트폰·반도체·조선 등 주력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 지난 세기에 씨를 뿌린 산업들이다. 인공지능(AI)과 바이오·로봇·양자·우주·핵융합…. R&D 투자는 나름 열심히 해오고 있는데, 20세기처럼 성장엔진으로 등장한 신산업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피크 코리아(Peak Korea)’라는 표현이 회자한다. 한국 경제가 이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정점에 달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꼴찌를 못 벗어나는 합계출산율(0.75명)에,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도 1%대로 떨어졌다.
특허 무효율 급격히 줄인 일본
대한민국은 정말 특허강국일까. 지난 7일 열린 국가지식재산위원회의 ‘IP(지식재산) 정책포럼’은 특허강국 대한민국의 허상을 발가벗겼다. 이광형 지식재산위 민간위원장은 포럼 서두부터 “더이상 특허강국이란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한국의 특허 무효율은 거의 동전치기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특허심판에서 출원된 특허가 무효되는 확률이 앞 아니면 뒤가 나올 확률이 50%인 동전치기와 거의 비슷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2023년 기준 한국의 특허 무효율은 44.4%로, 일본(11.5%)과 미국(31.3%)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특허 무효율이란 심판 또는 소송이 제기된 총 특허 중에 무효화한 특허의 비율을 말한다. 일본의 경우 2006년만 하더라도 특허 무효율이 60%를 넘었지만, 특허권자에게 권리를 방어할 기회를 보장하는 ‘무효 심결 예고제 도입’ 등의 도입으로 무효율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왜 유독 한국의 특허 무효율이 높을까. 가장 먼저 지적되는 건 특허출원 명세서 작성 단계에서의 부실함이다. 선행기술 조사를 통해 발명의 특이성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다. 전문인력 부족으로 특허 심사 단계에서 이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지선구 금오공대 창의IP센터 교수는 “한국은 선행기술 검색 정확성 여부가 전체 무효 사유의 90%를 차지한다”며 “우리 특허청 심사관의 1인당 처리 건수가 연간 181건으로, 미국(62건)은 물론 일본(148건)에 비해도 지나치게 많아 제대로 된 심사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특허 무효율이 높으면 R&D 성과를 특허출원하더라도, 기술 탈취나 법적 분쟁으로 인해 권리를 상실하기 쉽다. 한국 특허의 법적 안정성이 낮은 탓에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신뢰도가 낮게 평가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부실 특허 출원과 심사로 인한 특허무효에 기업은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 건축용 첨단 거푸집인 데크플레이트를 생산하는 코스닥 상장사 덕산EPC가 대표적 사례다. 건축용 데크플레이트 국내 시장 점유율 40%인 이 기업은 지난 10년간 이어진 특허침해 소송 끝인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특허무효’ 판결을 받아야 했다. 특허를 침해한 기업들에 세계시장 점유율을 고스란히 내줘야 하는 상황에 빠진 거다.
특허강국의 허상은 기업뿐이 아니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등에도 부실 특허가 만연하다. 대전 지역 대학의 이공계 대학원장을 맡고 있는 교수는 학계의 허울 가득한 특허출원 현실을 고백했다. “많은 교수·연구자들이 습관처럼 특허를 내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정부와 공공기관이 연구·개발 과제를 평가할 때 특허출원을 중요한 정량지표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허가 등록·유지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요. 정말 가치 있는 특허라면 그러겠어요?” 잘못된 R&D 평가 체계가 하나 마나 한 연구를 낳고 부실 특허를 양산한다는 지적이다.
문화예술에 가려진 기술수지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지식재산권 무역수지가 1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언뜻 보면 특허강국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라 여겨지지만, 실은 아니다. 전 세계적 한류 바람에 가요와 영화 등 한국의 문화예술 저작권이 13억 달러 이상 흑자를 올린 덕분이다. 특허와 실용신안권 등 산업재산권의 경우 11억 달러 이상 적자를 냈다. 특허 강국 한국의 실상이다. 이강민 대한변리사회 부회장은 “이제는 특허를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고품질·명품 특허가 필요한 때”라며 “국가 R&D 과제를 수행하는 대학과 연구기관이 특허 침해가 어려운 고품질 특허를 창출할 수 있도록 표준 프로세스 가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허강국이 과학기술 강국이다. 특허의 태생부터 그랬다. 성문법 형태의 최초 특허법은 17세기 영국에서 처음 생겨났다. 영국이 유럽 대륙의 과학기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특허법을 만들고 개인에게 개발 권리를 보장해줬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 특허의 주무대는 미국이다. 전세계 기업과 과학기술인이 R&D로 낳은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특허청에 출원한다. 특허분쟁이 생기면, 시작이 어디든 본 전쟁터는 당연히 미국이다. 이종호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교수 시절 개발한 3차원 입체구조의 반도체 소자 기술인 핀펫(FinFet) 특허에 대해 애플·삼성전자 등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들과 소송을 벌인 곳도 미국,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전기차 배터리 기술 및 영업비밀 침해를 두고 분쟁을 벌인 곳도 역시 미국이다. 몽상일까. 우리 기업뿐 아니라 해외 유수 기업들까지 우리 땅 대전 특허법원에 와서 특허소송을 벌일 날이 올 수 있을까.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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