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인사이드 아트] 시선의 권력을 폭로한 바버라 크루거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떤 감각보다 눈을 신뢰한다. 보거나 읽는 시각 기능은 뇌의 발달이나 인지 기능의 측면에서 언제나 믿음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매체의 기술 발전으로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보고 읽는 것이 더 이상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레거시 미디어 외에도 소셜미디어(SNS)의 발달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집단적 이익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일찍이 마셜 맥루한은 신문이나 TV, 언론·광고 등 미디어를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로 보지 않고 인간의 감각과 사고방식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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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문구 활용 시선의 정치학
엘리너 루스벨트 메시지 비틀어
트럼프 얼굴에 ‘실패자’ 문구도
」
![바버라 크루거,‘무제’(미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1997년. [사진 Barbara Kruger]](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7/joongang/20250317001836626cyoj.jpg)
대중 매체의 광고 기법을 활용하여 현대미술에서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가가 바버라 크루거(1945~ )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칸트)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할 때 자주 떠올리는 구절이다. 개념미술가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이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무엇보다 직관적이다. 대학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편집자로 일했던 그녀는 저널리즘이나 광고 매체가 어떻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지 알았다.
언어적 감각이 뛰어났던 크루거는 미술 작가로 전향하여 사진 이미지(보다)와 텍스트(읽다)를 결합하는 독창적인 스타일과 사회 비판적 담론으로 주목받아 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1980)로 치환하고, ‘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1990),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2012) 같은 간결한 문구(슬로건)와 흑백사진의 결합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성 중심의 사회적 편견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소비주의와 욕망, 젠더와 계급, 사회 규범 속에 작동하는 감시와 통제,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 등을 ‘시선의 정치학’으로 풀어낸 것이다.
바버라 크루거의 1997년 작품 ‘무제’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음미해 볼 만하다. 한 여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점안기로 액체를 넣는 흑백사진 위에 강렬한 디자인 서체로, ‘미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문구를 배열하였다. 여성의 눈에 안약을 투여하는 모습과 인용된 텍스트는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여기서 ‘미래’란 꿈과 희망 혹은 통찰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크루거 작품에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차용되면서 묘한 역설과 모순이 작동한다. ‘본다(seeing)’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작용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안약을 넣는 행위는 눈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향상시키거나 교정하려는 의미를 시사한다. 인공 눈물은 자연과 모방(흉내),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손동작 역시 자신의 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되고, 여성의 시선 또한 자율적이지 않아 보인다. 해체된 퍼즐처럼 흘러내리는 단어들은 미래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태도가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에 대한 다양한 함의를 내포한다.
미디어의 허구, 권력 구조를 비판해왔던 그녀의 입장에선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누가 꿈꾸는지가 아니라, 누가 미래를 정의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2016년 ‘뉴욕 매거진’의 표지 의뢰를 받은 그녀는 도널드 트럼프(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의 얼굴에 대문자 ‘실패자(LOSER)’라는 단어를 집어넣기도 했다. 트럼프가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던 언어의 역설적인 차용인 것이다. 크루거의 예술적 실천은 단순히 트럼프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행동, 그리고 선거 캠페인을 둘러싼 미디어 스펙터클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었다.
트럼프의 재선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그리고 계엄 사태 이후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바라보며, 우리의 미래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묻게 된다. ‘미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이미지의 차용이나 인용구를 넘어선다. 우리에게 미래는 열려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미래를 형성하는 것은 통찰력과 비전을 지닌 개인뿐만 아니라, 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누가 미래를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크루거의 미래에 관한 시선은 실상 보이지 않는 힘과 권력 간의 관계를 다시금 성찰하게 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가깝다.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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