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 출근하고 싶어"…육아 100일 체험기[남기자의 체헐리즘]
행복 1번에 질문 100번, 의심 200번과 자책 300번
아내와 서로 "고생했다"며 하루하루 넘어가던 날들
분명 맘을 단단히 먹었었다. 육아는 겁나 힘들단 얘기도 많이 들었다. 이제 잠은 다 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아들 앞에서 대놓고 "무자식 상팔자다"라고 했다(예?).
뭐 하러 애 낳니, 편하게 둘이 놀러 다니며 살아.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 안 한다. 아빠가 옆에서 그 얘길 듣고 못 들은 척했다. 쓰디썼다. 경력자의 충언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진심 어린 충고는 쓴 법이었다.
실은 '딩크(애 안 낳는 것)'도 고민했었다. 둘이 살아도 좋고 행복해서. 세월이 흘러 이젠 결정해야 했다. 아내 나이가 그렇게 됐다. 오래 대화한 끝에 결심했다. 아가를 하나만 낳자. 우리가 몰랐던 행복이 있지 않을까. 둘이 함께 한다면 괜찮을 거야.
"아, 환자분. 정자 개수는 괜찮은데, 모양이…."
비뇨기과에 갔더니 정자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정자가 모양이 있어요? 그렇단다. 정상 모양 정자가 몇 프로밖에 안 된다고 했다(차마 밝힐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임신 가능성이 높은 정자가 많지 않단 거다.
멍해졌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양으로 승부하면 되지 않을까요. 인해전술, 뭐 그런 거요. 의사는 냉정했다. 아뇨,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울컥. 대체 이유가 뭐냐고 했다. 술·담배는 안 하시는데, 뱃살도 좀 빼셔야 하고요. 오래 앉아 계시지 마시고, 스트레스도 좀 없으시면 좋고(하하, 그래요).
아내에게 미안했다. 임신 테스트기 한 줄이 뜰 때마다, 조명을 다 켜놓고 각도를 바꾸며 다시 살폈다. 단호박으로 한 줄. 쥐며느리처럼 몸을 돌돌 말고 싶었다. 노력하기로 했다. 매일 저녁 뜀박질하고, 정자에 좋단 견과류와 토마토주스를 매일 먹은 결과, 결국 난임병원에 가서야 임신했다. 매일 배에 주사를 놓아가며, 아내가 많이 고생했다.
고대하던 아가가 찾아왔다. 아들이었다. 태명을 '나무'라고 지었다. 나무를 이유 없이 좋아해서. 사계절처럼 다채로우며 단단하게 뿌릴 내리란 뜻에서. 나무야, 와줘서 고맙다. 참 오래 기다렸어. 귀도 없는 태아에게 열심히 얘기했다. 행여나 바깥에 알렸다가 떠날까 봐, 안정기(임신 12주)가 지나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랐다. 점 하나만 하던 아가가 심장 소릴 들려주었다. 컴컴한 초음파실에서 별안간 울음을 쏟았다. 아내는 심한 감기에 걸려 기침에 밤을 새우면서도, 약 한 번 안 먹고 나무를 지켰다. 그리 안전히 자랐다. 통통통, 발길질하고, 꿀렁하며 자세를 바꿀 때마다 함께 탄성을 질렀다. 딸꾹질하는 거 보라고 웃었다. 그리 만삭이 되었다.
출산예정일보다 빨라 응급 제왕절개로, 수술실로 들어가며 아내는 당부했다. 잘 찍을게. 설렘, 기다림보단 두렵고 걱정됐다. 수술실 앞을 분주히 서성였다. 둘다 제발 건강하게만, 제발.
분홍색 속싸개를 입은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도 못 뜨는 모습. 음, 쭈글쭈글하고, 생각보다 좀 못생겼고, 너무나 작았다. 이 장면을 늘 상상했다. 벅차게 마주하며 울지 않을까, 내가 네 아빠야, 하며 환희로 가득하지 않을까.
첫 만남. 기쁘지만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느낌. 솔직한 기분이 그랬다. 그러나 그럼 안 될 것 같아 있는 힘껏 웃어 보였다. 텐션을 끌어 올렸다. 이제 아빠가 됐잖아, 아빠답게 잘해야지. 그런 의무감을 갑옷처럼 단단히 둘렀다.
먼저 신생아실에 올라간 아가보다, 아직 수술 중인 아내 걱정이 더 컸다. 수술대기실 화면만 뚫어져라 봤다. 잘 끝났단 의사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안도했다.
병원 4박 5일 입원을 거쳐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천천히 갈게요'를 차 뒤에 붙이고 거북이처럼 운전했다. 급히 끼어드는 차를 향해 나쁜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엄마·아빠를 보고 자랄 존재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나아가야 했다, 아빠답게. 여전히 긴장과 걱정을 주로 품은 채.
너무 어려워요. 잘할 수 있을까요. 버벅대며 한숨 쉬던 순간들. 살면서 뭐든 애쓰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건만. 작은 존재 앞에선 이리 작아졌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최대한 많이 배워야 한단 생각에, 매일 이리 물음을 쏟아내었다. 유선 전화로 1004를 누르면 늘 달려 와주셨다. 애정하던 선생님이 이리 말했다.
"울면 불편한 게 없는지 먼저 봐야 해요. 우선 기저귀는 괜찮은가, 배가 고프진 않나, 가스가 찼나, 졸린 걸까. 저희도 다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하나하나 살펴보며 찾아가는 거지요."
그리 오래 봤어도 역시 그렇구나. 정답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아가 울음은 유일한 언어라고. 그러니 두려워 말란 말에도 자꾸 위축되었다. 내가 서툴러 자꾸 우는 것 같아서. 안았다가 불편해하면 주눅이 들고, 눈치를 살피게 됐다. 이리 버벅거리는 게 계속될 것만 같아 작아지기만 했다.
내게 말해줄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닿을 수 없는 미래만 바라고 있었다.
"흐윽, 흐윽, 흐윽, 끄아아아아앙. 흐으윽, 흑, 흑, 헤엑, 끄아아아아아앙."
아가 인상이 찌푸려지면 오금이 저렸다. 또 울겠구나, 하면 여지없이 강성으로 터졌다. 그간 떵님이가 순한 줄로만 알았다. 그건 산후조리원 한정이었다. 아니, 선생님들이 다 돌봐주셨기 때문에 몰랐던 거였다.
저녁으로 갈수록 떵님이는 울상이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지고, 잘 달래지지도 않았다. 품에 안아서 아무리 정성스레 애써도, 버둥거리며 더더욱 울기만 했다. 아는 불편이 밥과 기저귀뿐이라 아내는 모유 수유를 시도하고, 난 기저귀만 갈아댔다.
그러다 과식해 가스가 차기도 했다. 배앓이가 시작됐는지 지옥 같은 강한 울음이 시작되기도 했다. 10분은 온화하게, 다시 10분은 차분하게, 또 10분은 무표정하게 달랬다.
톡, 톡, 톡. 등을 두드리던 손길이 퉁, 퉁, 퉁, 하고. 나도 모르게 짜증과 함께 조금 더 강해졌을 때. 그걸 알아차린 뒤 멈추고 자책하고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이 정도 의지로 아빠가 되려 한 건가 싶어 바닥을 쳤을 때. 집에 있음에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그저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는 것밖엔 없었다. 쓰러지면 눈 감고, 희미하게 회복한 뒤 다시 반복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안쓰럽고, 힘들 것 같아 감정 이입하다 또 괴롭고. 하나하나 다 내 탓인듯하여 자책하고. 결국 돌보는 주체는 나와 아내밖에 없기에 버겁기도 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공부하려 애써도 배움 자체가 어려운 영역이었다.
예컨대, 트림을 꼭 시켜야 하는데, 가장 많이 하는 '어깨 얹기 자세'를 죽어라 거부했다. 유튜브에서 온갖 자세를 다 배워봤으나, 전부 싫어했다. 맘카페 등 커뮤니티를 자주 찾아봐도. 물음은 많은데 답변은 거의 다 짐작이었다.
"저희 아기도 먹다가 자고 그랬었어요. 귀 만져도 안 깨고, 내려놓아도 자고요. 힘드시겠어요."
비슷한 상황에 놓여 힘들었다던 누군가의 그 말. 그게 유일한 위로라 정답이 뭔지 잘 모름에도 계속 찾아보게 됐다.
아가는 위장이 작아 배고플 때마다 깨서 운다고. 통상 1시간에서, 길어도 2시간 정도면 배가 꺼져서 울었다. 이 타이밍이 정말 예측할 수 없어서, 무작위로 들이닥치는 느낌이었다. 아빠를 찾는구나, 절박하게. 그리 생각할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고된 육아 끝에 짜장면을 주문해놓고, 조용히 넷플릭스를 켜두고. 한숨을 돌리며 우리 시간을 누리려다가, 잠든 줄 알았던 떵님이가 힘차게 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시간 정도를 시달린 뒤 퉁퉁 불은 짜장면을 보며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우리 이제 면으로 된 건 다신 시키지 말자고. 다짐하며 배고픔에 그릇을 다 비웠다.
하루의 일은 반드시 끝나고, 퇴근하면 쉬었었다. 그 틈을 간절히 바라고 있단 걸, 이전의 삶을 다 내려놓지 못했단 걸 문득 깨달았다. 출산 휴가를 쓰며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의미 없단 걸 깨달았다. '휴(쉴 휴(休))'자는 빼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이고, 트림을 정성스레 길게 시키고, 재우고. 짧게 자고 또 먹을 시간이 되고, 먹이고 트림시키다 응아 냄새가 나서 기저귀를 갈다가 동시에 쉬야를 싸서 공격을 당하고, 다 갈아두고 공을 들여 재우려 했더니 미처 다 못 싼 응아를 해서 다시 씻기고. 그러느라 잠을 깨고 거의 못 잔 채 또 먹을 시간이 됐다.
문득 정신 차리니 사흘이 지나 있었다. 그 사이 머리를 한 번도 감지 못 했단 걸 깨달았다. 길어진 수염을 깎으며 오랜만에 거울을 보다가, 온전히 동떨어진 변기 위에서 우연히 뜬 유럽 시골의 풍경을 보다가. 내가 쌓아왔던 커다란 세계가 완전히 전환이 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시간이 필요한 거였다.
바깥에 못 나가고 있다가, 너무 답답할 땐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쉬었다. 겨울바람이 차지 않고 시원했다. 아주 시원해서 그대로 맞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주 그런 말을 했다. 혼자선 도저히 못 해냈을 것 같다고.
"변 색깔이 괜찮은 걸까? 콧물처럼 진득한데 괜찮은가. 열이 나는 게 아닐까.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나를 계속 의심하게 되잖아. 그럴 때 같이 찾아보잖아. 그래서 시간이 흐를 수 있었던 것 같아. 혼자였다면 너무 힘들었겠지. 이게 아닐까, 저게 아닐까, 일단 그렇게 믿고 해보자고."
누구의 말이랄 것도 없이 공감하던 대화들. 정답이 뭔진 몰라도, 매번 고생했다 말해주던 이가 있어서 넘어갔다고.
졸려도 잠들지 못해 귀가 찢어질 듯 울던 떵님이를 안고 절망하던 날이 있었다. 힘들어하는 게 보여 속상했고, 그럼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자책했고. 배를 미리 채워두지 못해 예민해진 상태여서 인내심이 바닥을 치던 날.
마지막 필살기였던 '수돗물틀기'까지 쓰고도 달래어지지 않아서.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물소리에 묻혀 울다 사라지고 싶을 만큼 울적했던 날. 컴컴하게 침전되던 때, 화장실 문을 열고 이리 말해주던 아내가 있었다.
"이제 내가 재워볼게, 좀 쉬어. 쓰러지겠어."
아내도 이미 힘들단 걸 알면서도 아가를 건넬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약"이란 말조차 싫고 위로가 안 될 때, 유일한 힘이 된 건 곁에 있던, 단 한 사람.
육아는 '종합힘듦예술'이란 걸 알아버렸기에. 체력은 바닥나고 감정은 소모되며 자존감은 떨어지고 실시간으로 힘듦이 달라져 끊임없이 배워야 하기에.
5주간의 출산 휴가(설 연휴 포함)가 끝나고 모처럼 길을 걸어 다니는, 다 큰 어른들을 보았을 때.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존재가 이리 어엿하게 걸어 다니는 게, 우뚝 서 있는 모든 이가 하나하나 다 기적처럼 느껴졌었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다. 한 사람을 그 정도로 키워내는 건.
그러다 떠오른 이가 있었다. 첫 손주를 보러 오겠다며 찾아와, 떵님이를 안으며 기뻐하던 사람, 엄마. 40년 만에 안았다면서, 안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게 해 감탄에 이어 숙연하게 만들었던 존재. 떵님이가 힘들게 할 때면 "나도 엄마 있어 인마"하고 장난스레 투정 부렸었던, 영원한 엄마.
내가 태어난 과정도, 그 당시 모습도 까맣게 모른 채 알아서 자란 것처럼 살다가, 비로소 그걸 하나하나 다 겪으며 저절로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걸 알았을 때. 이리 물었었다. 실은 물음보단 존경과 감사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진정 경험하며 알게 되었으므로.
"엄마는 이 힘든 걸 어떻게 혼자 다 했을까.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지 모르겠어."
말도 마라, 천기저귀 빠느라 애썼지, 동네 엄마들에게 몰라서 물었고. 그땐 다 그랬다. 그로부터 시작된, 모두 첨 듣는 얘기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게 곱게 갈아 넣었던 엄마의 젊은 시절을. 새삼 하나하나 다시 듣고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충분히 잘 먹고 있는 게 맞느냐며 의심했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촉각이 곤두서서, 더 먹여볼까, 아내와 자주 말하곤 했었다. 잠이 들었다가 얼마 못 자고 깨면 역시나 배고픈 게 아니냐며 염려했다.
모유를 먹다가 잘 때면 깨우는 게 미안했었다. 귀와 발을 살살 만져도 안 일어나서, 바닥에 내려놓으니 으앙, 하고 울었다. 울린 게 미안해서 또 속상했다. 그러지 않고 재웠을 땐, 양껏 못 먹인 게 또 미안해서 자책했었다.
트림하기 싫다고 발버둥 칠 때, 15분을 씨름하다가 어쩔 수 없지, 하며 자라고 내려놓은 날도 있었다. 자다 깨서 울 때, 역시 더 시켰어야 했는데 하며, 적당히 타협한 게 미안해 또 스스로 탓했다. 그러나 또 몸부림칠 땐, 더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게 내 탓 같아서 자책했었다.
의심과 자책이 반복되던 어느 날, 구청에 신청해 간호사 선생님이 집에 방문했었다. 자세히 이것저것 여쭤보시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얘기했다. 역시나 잘 못 먹었을 거야, 다른 아가들보다 작을 거야, 그런 이야기가 선고되길 기다릴 때였다. 간호사 선생님이 말했다.
"아가 너무 잘 크고 있는데요. 평균보다 몸무게도 더 나가고, 키도 크고요."
온몸의 긴장에 확 풀려 아내와 난 이리 답했다. 저희가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늘 걱정했고요. 그러자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이리 말했다.
"너무 잘하고 계신 거예요. 이렇게 잘 컸잖아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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