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위선·증오의 연대기 끊는 건 사랑”

양민경 2025. 3. 1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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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난한 사람들/하워드 서먼 지음/홍종락 옮김/복있는사람
사진은 위부터 흑인 민권운동의 시발점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촉발한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인종 분리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한 당시 탔던 버스, 파크스가 경찰에 체포돼 지문을 찍는 모습. 위키피디아 제공


“‘종들아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주인이 다니던 교회 백인 목사가 일 년에 서너 번씩 노예들에게 설교한 본문이다. 설교를 들으며 창조주께 약속했다. ‘내가 자유를 얻고 글을 깨친다면 이 본문만은 절대 읽지 않겠다’고.”

20세기 미국 민권·인권 운동가에게 깊은 영향을 준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국 신학자 하워드 서먼(1899~1981)이 대학생 시절 외할머니에게 들은 말이다. 서먼은 유년 시절 글을 모르는 외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성경 여러 본문을 낭독했는데 바울 서신만은 유독 늘 제외됐다. 이유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가 노예 시절 외할머니가 겪은 아픔을 마주한 그는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회고한다. 외할머니의 한 서린 답은 서먼이 ‘막다른 벽에 몰린 이들에게 예수의 종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탐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49년 처음 출간된 책은 이 주제를 치열하게 파고든 그의 대표작이다. 미국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에게 큰 영감을 준 책이기도 하다. 킹 목사는 흑인 민권운동의 시발점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1955) 투쟁을 이끌 당시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스리랑카에서 겪은 경험도 책 출간의 추동 요인이다. 모어하우스대와 로체스터 신학대학원 졸업 후 하워드대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5년 학생들과 인도와 스리랑카, 미얀마를 방문해 마하트마 간디 등 비폭력 저항운동가와 교류했다. 이때 콜롬보대의 한 힌두교인 교수가 ‘압제자를 편드는 기독교를 믿는 당신은 모든 유색인종의 배신자’라고 지적하자 “예수의 종교를 ‘권리를 빼앗긴 사람 및 불우한 사람’과 관련해 탐구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미국 신학자 하워드 서먼은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에서 예수가 ‘인류 역사 속 궁지에 몰린 모든 이들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서먼의 생전 모습. 복있는사람 제공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흑인 등 유색인종은 인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일상의 모든 장소에서 인종 분리가 이뤄졌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을 위한 권리를 외치면 법적 제재를 받았다.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인 KKK단의 무력 보복을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을 ‘상속권 박탈자’라고 부르는 저자는 예수가 ‘인류 역사 속 궁지에 몰린 모든 이들의 동반자’며 성경은 ‘이들을 위한 저항 매뉴얼’이라고 주장한다. 나라 잃은 민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비주류로 산 예수는 “처음부터 이 땅의 수많은 사람과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에 정치·경제뿐 아니라 종교·문화적 권리를 빼앗긴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저항과 무저항뿐이었다. 한데 예수는 “천국이 우리 안에 있다”며 ‘하나님 나라’라는 제3의 선택지를 택했다. 배신이자 굴종, 자기기만처럼 보일 수 있는 처사였다. 그렇지만 저자는 예수의 선택에 대해 “내면의 삶을 타인이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운명의 열쇠를 그의 손에 넘기는 꼴임을 명확한 현실감각으로 인식한 결과”라고 평한다. “권리를 빼앗긴 이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위선, 증오를 극복하는 ‘좋은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들 감정을 ‘억압받는 이들을 쫓는 지옥의 세 마리 사냥개’로 표현한 그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비상한 대담함만이 내면의 안정을 만들 수 있다”라며 “하나님의 자녀란 인식은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심오한 믿음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감정을 인정하되 휘둘리지 않을 때 상대를 악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두려움과 위선, 증오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비결은 결국 ‘사랑’이란 이야기다.

1940년대 미국 흑인뿐 아니라 불의한 세상 속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증오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상대를 한 인격으로 볼 수 있다’는 저자의 고언은 정치 양극화로 진통 중인 우리 사회도 돌아보게 한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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