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야 ‘상법 족쇄’ 강행

나상현, 김나한 2025. 3. 1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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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를 통과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으로 상법 개정을 추진한 지 4개월 만이다. 재계에선 트럼프발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경영 활동에 더 큰 족쇄가 채워졌다고 호소하고 있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일수록 투기 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회는 13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상법 개정안을 재석 280인 중 찬성 186명, 반대 91명, 기권 3명으로 통과시켰다. 야당 주도로 추진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고, 전자주주총회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업 이사가 의사결정을 할 때 회사뿐이 아닌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명문화하고, 전자주주총회 의무화로 주주의 주총 참여율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야당은 한국 증시를 밸류업(기업가치 상승)하기 위한 개정이라는 입장이다. 박희승 민주당 의원은 이날 법안 설명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가 해소되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진 찬반 토론에서 최은석 국민의힘 의원은 “초보자들이 만든 위험한 탁상공론의 결과물”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장기적 기업가치 상승부터 초단기 매매차익 극대화까지, 각 주주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며 “모든 주주를 만족하게 하는 기업의 혁신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오랜 설득에도 거야 주도의 국회가 상법을 통과시키자 재계는 일제히 반발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면 경영 판단 과정에서 불이익을 주장하는 주주들의 소송 남발로 인수합병, 대규모 투자 등이 차질을 빚어 기업의 장기적 발전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며 “행동주의 펀드들의 과도한 배당 요구, 경영 개입, 단기적 이익 추구 행위 등이 빈번하게 돼 기업들이 온전히 경영에 전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주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경영진들 소송에 시달릴 수도”


13일 국회에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가결되고 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넓히고 전자주주총회 도입을 의무화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임현동 기자
이어 “상법 개정은 우리 기업들을 투기 자본의 먹잇감으로 내몰아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함으로써 국가 경제의 밸류다운(기업가치 하락)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법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법안 내용을 보면 ‘주주’ ‘총주주’ ‘전체 주주’ 등 주주를 표현하는 용어가 혼재돼 있다”며 “이렇다 보니 주주가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회사와 주주 간에 의견이 엇갈릴 때 이사는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등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국회 찬반 토론회에서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도 “총주주의 이익 위반을 판단할 구체적 기준이 없음에도 이사들을 민형사 소추의 위험에 노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제조업이 주력인 우리 기업의 경우 중장기적인 설비투자를 위한 정상적인 의사결정까지 소송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도 “쉽게 말해 ‘주가가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중소·중견기업들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대기업보다 지분 구조가 취약한 기업이 많은 만큼 소액주주들이 각자의 득실에 따라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소송에 따른 부담도 훨씬 크다. “법무 전담 조직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글로벌 기관(투자자)과 펀드의 경영 간섭에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이 크다”(중소기업중앙회)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또 해외에서 이사의 경영상 판단에 대한 면책 규정을 두는 것과 달리, 한국 상법 개정안은 이 같은 방어권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최 교수는 “미국 등에선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치며 충분히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사의 개인적인 이해관계 없이 경영상 판단을 했다면 면책된다는 명확한 규정이 있다”며 “개정된 상법엔 경영판단 원칙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여당은 상법 개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재계도 자본시장법을 개정하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소액주주를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상장회사에 합병·분할 시 주주 이익 보호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골자다. 이사회가 합병·분할 등의 목적과 기대효과, 가액의 적정성 등에 대한 의견서를 공시해야 하고, 기업의 실질 가치를 반영한 공정한 가액을 외부 평가기관을 통해 받도록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상법 개정이 아닌 자본시장법을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효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계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공식 요청했다. 여당도 최 대행에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본회의 표결에 앞서 “민주당이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킨다면 국민의힘은 즉각 재의요구권을 건의해 우리 기업들을 지킬 것”이라고 예고했다.

나상현·김나한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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