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이 ‘폭력’과 ‘광기’가 되지 않으려면

한겨레21 2025. 3. 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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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멋진 ‘장면’ 말고, 남을 소품화하지 말고… ‘생애사’ 속에서 자기 계몽의 연대기를 돌아보라
김계리 변호사가 2025년 2월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대통령 윤석열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 출석해 대화하고 있다. 김계리 변호사는 이날 최후 변론에서 “저는 계몽되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지난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을 꼽으라면 단연 “ 나는 계몽되었습니다 ” 였을 것이다 . 내란죄 피고인인 대통령 윤석열의 변호인단 중 한 명인 김계리 변호사가 최후 변론에서 한 말이다 . ‘ 출산과 육아로 바빠 세상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는데 계엄 선포를 통해 민주당의 입법 독재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며 ‘자신이 계엄을 통해 계몽됐다’고 했다 . 그에게는 ‘계엄’ 령이 정말 ‘계몽’ 령이었다며 계엄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

나는 언제 ‘계몽’된 것일까

김계리 변호사의 말을 듣고 돌아봤다. 나는 언제 계몽된 것일까?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들을 이어붙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에 따르면 삶은 경험이 갱신되는 연속적 과정이다. 계몽도 경험이라면 경험으로서의 계몽 역시 삶을 통해 연속적으로 갱신돼간다. 따라서 깨달음의 장면과 장면이 연결돼야 계몽의 서사가 되며 그래야 그것이 비로소 계몽이라는 주제로 엮어진 내 ‘삶’이 되기 때문이다. 계몽의 단절과 연속 과정으로서의 생애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현재를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봤다. 듀이에 따르면 삶은 그런 부단한 갱신의 과정이며 어떻게 갱신됐는지를 돌아보고 풀어가는 것이 바로 이야기로서의 삶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가장 먼저 만난 장면은 ‘국민’학교 때 만난 부패한 담임교사였다. 그는 정말 돈을 밝혔다. 그에게는 내가 반장이 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바치지 못한’ 나를 교묘하고 집요하게 괴롭혔다.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기호처럼 거짓말하는 학생이 되면 안 됩니다”라고 망신을 주기도 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 나를 보고 어머니는 나를 아꼈던,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전년도 담임교사에게 전화해 상담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리해서라도 선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당시 우리 집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액수의 선물을 했다.

그때 나는 세상에 대해 ‘계몽’됐다. 세상은 결코 정의롭지 않았으며 제도는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정의’에 대한 순진하고 맹목적인 믿음이 깨졌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도 깨달았다. 강한 자는 살아남을 수 있고 어린아이가 강해지려면 2등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를 유지하는 1등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가르쳐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세상의 ‘현실’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이날 나는 계몽됐다.(그럼 나는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해줬다고 이 부패한 교사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는 말은 마치 내가 깨달았으니 그 계기를 만들어준 그 교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두 번째 깨달음은 중학교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가담한 누나가 생일 선물로 책을 한 권 줬다.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 해직 교사들이 쓴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펑펑 울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국민학교 때의 부정적 경험이 사춘기와 겹쳐 교육과 학교에 대한 냉소가 극에 달해 있었다. 교사들은 나를 칭찬했지만 나는 교사들을 경멸하던 때였다. 그때 이 책은 ‘이런 교사들도 있었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앞선 경험이 현실에 대해 깨닫게 했다면, 이 깨달음은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했다. 현실이 부정의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임을 깨달았다.(나는 아직도 이 책을 쓰신 교사들에게 감사한다. 한 분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가장 멋지면서도 가슴 아픈 깨달음의 큰 스승들이다.)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 해직 교사들이 쓴 책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의 표지.

삶에서 겉도는 말이 아닌 말을 깨달아야

세 번째 깨달음은 대학에 다닐 때였다. 내 지도교수이기도 한 조한혜정 교수의 교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내가 터득한 기술은 그의 교실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둥그렇게 앉아 자기가 연구하겠다는 주제를 뽑고 현장연구를 하면서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조한혜정 교수의 질문은 그 설명이 연구하고 있는 자신의 언어인지, 아니면 그 언어에 내가 본 것을 끼워 맞춘 것인지를 돌아보게 했다. 그의 책에서 쓴 표현대로라면 그의 질문은 현장연구를 다녀와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무엇인가 대단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사실 그 말은 삶에서 겉도는 말이었으며, 어떤 삶이 대단히 의미 있는 것처럼 보였더라도 사실 그 삶이 헛도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의 교실에서 나는 다른 교육과 교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넘어 그 ‘실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언어가 중요하다는 말을 늘 하지만 그 언어가 삶을 지배하고 환상에 빠뜨리게 하는 ‘파란 약’(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한 환상 속에 있게 하는 약)이 아닌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됐다. ‘빨간 약’이라고 생각한 계몽의 도구인 언어가 ‘파란 약’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깨달음의 도구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학점이 아쉬운 과목이 있었다. 그 과목은 지도교수였던 조한혜정 교수가 가르쳤는데 학기 동안 내가 낸 글을 많이 칭찬했기에 의외였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으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너는 한 학기 동안 가장 잘 배운 학생이었지. 그런데 넌 너 혼자 배웠잖아. 그 교실의 다른 학생들하고 나누지 않고.” 교실이라는 공간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 교실은 나 홀로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연구실이 아닌 교실은 나는 다른 사람의 공부에, 그들은 나의 연구에 ‘곁불’을 쬐는 화톳불이 켜져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몇 해 뒤에 한 전문대학 강의실에 섰다. 한 학기 내내 학생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며 패닉에 빠졌다. 나에게는 너무나 명료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언어인 ‘구조’라는 말이 그들에게는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말, 이해할 수 없는 말 위에 다른 말로 건물을 지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내 말은 겉도는 말이었고, 그들의 삶에서 나는 겉돌고 있었다. 교실은 가능성과 곁불의 공간이기는커녕 짜증과 절망의 공간이었다. 그 학기를 마치며 나는 ‘구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내가 가진 언어를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 전에는 다시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계몽’이 ‘장면’일 때 생기는 위험

그리고 지금 다시 그 대학,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실에서 몇 년째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사실 학기 시작마다 바들바들 떨면서 교실에 들어간다. 내가 가진 언어와 지식이 만화를 그리는 학생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 동시대적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지식이 저들의 삶에서 겉도는 말이 되지 않을까. 저들의 삶에서 내 말이 겉도는 순간 이 교실에서 내 삶은 헛돌게 될 것인데. 그 공포는 여전하다.

그 공포 덕분에 가르침, 즉 계몽의 도구인 내 말과 지식의 미몽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내 계몽의 도구인 내 언어에 확신이 지나치면 ‘모든 문제’는 무지한 학생들이 된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으면 그건 그들의 ‘무식’ 때문이지 그들의 삶에서 헛돈 내 언어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가르침의 실패를 배우는 자에게 전가하는 매우 비겁한 짓이다.

그 비겁을 감추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폭력이다. “때려서라도 가르쳐야지.” 실제로 계몽주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와 함께했다. 여성과 소수인종과 아이들을 때리고, 장애인에게 반인권적으로 불임수술을 강제했다. 유럽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츠베탕 토도로프의 책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에 잘 나온 것처럼 나폴레옹은 계몽주의의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저자는 여기에서 “이성의 잠만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각성 상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계몽은 다른 모든 것을 이성의 힘으로 계몽했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타자에게는 이성의 족쇄를 채우며 자신(=이성=계몽)의 광기에는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것이 계몽이다.

내가 이 글을 통해 ‘계몽’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계몽의 연대기를 돌아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계몽’이 생애사적인 것인지 아니면 지금 딱 한 장면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아직 내 생애의 다른 계몽의 장면들과 꿰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서사’가 아니라 ‘장면’일 뿐이다. 장면은 정점의 장면 딱 한 장면만 절대시하고 나머지는 사소한 것으로 취급한다. 심지어 모순이 있어도 상관없다. 모든 것은 그 정점을 위해/향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말로 신화적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그 ‘계몽’으로 자신의 생애사를 서사로 꿰어내야 한다.

나아가 그 서사는 자신의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서의 서사가 포함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로 계몽주의적인 타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이것은 이성/계몽의 광기이기에 이보다 더 끔찍한 폭력과 야만은 없다. 이미 이 폭력은 저 ‘계몽’의 현장에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말에서부터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이재명/김정은/시진핑 ×××라고 해봐”라고 한 다음에 거부하면 온갖 쌍욕을 다 퍼붓는 광기까지. 그 ‘계몽’의 광기를 계몽하는 것은 당신의 생애사에 포함돼 있는가?

‘계몽’의 광기를 계몽하고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나를 미혹시킨 장면을 떠나 장면을 ‘계몽’하며 역사에 들어가야 할 때다. 우리는 ‘멋진’ 장면 하나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멋진’ 장면 하나를 연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소품으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는 내 삶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을 일시적으로 겨우 얻는다. 누군가는 교실에서, 누군가는 법정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거리와 광장에서.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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