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어머니 돌보는 67세입니다, 이렇게는 안 됩니다
[주일순 기자]
아이들 교육을 위해 캐나다로 이민을 간 지 7년쯤 지난 때였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다. 다행히 중증 와상 상태까지 가진 않았다. 의사는 도우미만 있으면 가벼운 산책이 가능하니, 매일 운동을 시키라고 했다.
나는 생업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부모님과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사람들이 특별히 축복받은 낙원에 사는 것처럼 부러웠다. 24시간 요양보호사에게 어머니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할 수 있도록 당부를 하고,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캐나다로 돌렸다.
이모의 다급한 전화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가끔 어머니를 들여다보는 이모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거의 드시지를 못하고 내내 수면 상태라고 했다. 매일 산책이 가능했던 사람이 수면 상태라는 건 말이 안 됐다. 나는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것이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8년 전의 일이다. 당시 갑작스럽게 도착한 나를 보고 24시간 요양사는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침실에 계신 어머니부터 들여다보았다. 한눈에도 심신이 잔뜩 쪼그라든 모습에, 두 달 전의 엄마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딸이 왔다'라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어머니는 비몽사몽 느리고도 힘겹게 눈을 뜨셨다. 나를 알아보는 순간 반가움인지 서러움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 이제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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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70에 가까운 나이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령의 어머니를 돌봐오고 있다.(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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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새도 없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드리니, 단 두 수저를 넘기지 못하셨다. 냉장고에는 불어터진 흰 죽이 한 솥이나 있었다. 어머니는 잠을 자는 것인지 기운을 못 차리는 것인지 거의 수면 상태의 연속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보호자 없는 시간이 방치된 상태였다는 게 각종 검사로 드러났다.
정상적 식사 제공이 안 돼서 영양실조가 되었고, 긴급 수혈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 달간의 입원 생활이 시작됐다. 식사를 챙기다 보면 치통을 호소하셨고, 기저귀를 갈다 보면 비늘처럼 허옇게 뒤덮인 피부가 눈에 띄었다.
기본적인 양치와 씻기기가 잘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호자의 눈이 없는 환자와 요양보호사 단둘의 24시간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캐나다에서 '디포'를 운영했다. 일종의 세탁중개업이다. 세탁물을 받아 보관하면 외부의 세탁소가 가져가 세탁을 완성해 가져다준다. 내가 일하는 가게는 다운타운 한복판 병원과 각종 투자은행 등이 밀집한 초고층 빌딩 내에 있었다. 특별한 기술보다는 소통이 중요한 일이었다.
다소 늦게 배운 외국어로 하는 소통으로 단골 고객을 만들어간다는 게, 당시 내게는 기술 이상의 성취감을 주고 있었다. 세심한 서비스로 차츰 손님이 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에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찾아온 손님에게 허탕 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얼마간 '헬퍼(도우미)'로 지탱해 나갔으나, 고민 끝에 결국은 캐나다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노노돌봄, 소위 '노노케어'는 딸인 내게서 자유를 앗아갔다. 나의 하루는 철저히 어머니 스케줄에 맞춰져 움직였다. 요양사가 오는 시간에 잡다한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고, 장을 봐서 부지런히 식사 준비를 했다. 가능한 한 골고루 영양가 있게 해 드리려고 애쓴 탓인지 어머니는 서서히 기력을 차리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매일 규칙적인 운동을 시키고, 씻기는 일상은 갈수록 신생아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기도 했다. 다만 신생아처럼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대신,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게 가장 큰 희망이라는 것이 다르다.
어머니 돌봄에 후회는 없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70에 가까운 나이에 고령의 어머니를 돌봐오고 있다. 요즘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 매일 주택의 작은 마당을 산책하곤 한다. 힘든 날이면 먼 산을 바라보고 가슴 한 번 쓸어내리고, 외로운 날이면 산책길을 나서며 싱그러운 꽃향기로 위안을 얻는다(관련 기사: 내 마음의 휴식처, 마당 https://omn.kr/2bjru ).
이제 한국은 확연한 고령화 사회, 노인 천만 명 시대이다. 세상은 덜 낳고 오래 사는 방식으로 빠르게 변화해나간다. 그에 비해 현실적 복지 시스템은 인구 구조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순식간에 죽을 행운이 없는 이상, 오랜 시간 서서히 스러져가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노화가 덜 진행된 나이 든 딸들이 그 '누군가'를 감당해 왔다. 무너지는 둑을 온몸으로 매달려 막아온 꼴이다.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노쇠와 질병을 안고 가야 하는 시기가 며칠일 수도, 10년 일 수도 있다. 여기에 한 개인의 삶을 갈아 넣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과거 하던 일을 정리하고 어머니를 돌본 세월에 후회는 없다. 우리 세대까지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니 그렇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나에게 묶이는 건 원치 않는다. 그들의 인생을 잠식하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바람만은 아니다. 죽기 직전까지 내 발로 화장실 가는 게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하는 노인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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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통해 좀 더 폭넓고 촘촘한 돌봄 시스템이 시급히 자리 잡아야 한다.(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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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병원비, 요양원비, 간병비가 겹치면서 '간병파산'이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지를 절절히 실감한다. 내 아이들 세대에서는 돌봄을 맡은 가족이 파산과 고립으로 방치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방법을 찾기를 바란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노쇠와 질병을 안고 가는 시기는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자녀나 배우자가 홀로 돌봄을 감당하기에는 한 개인의 삶이 온전히 희생되어야 하는 일이다. 국가적 차원의 정책이 뒷받침되어 누구나 거쳐갈 노년의 삶이 모진 고통의 시간이 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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