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스톱더스틸 책 비치 안하면 CIA 신고" 도서관들 홍역
" “도서 신청 자체를 안 받던 시기였는데 거부했다고 좌표가 찍혀서 난감합니다.” "
서울에 있는 A 공공도서관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최근 A 도서관 직원들은 이달 초 책 『STOP THE STEAL(도둑질을 멈춰라:이하 스톱더스틸):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 기록』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A도서관이 이 책을 비치해달라는 신청을 “정치 목적 자료”라며 거부했다는 글이 소셜네트워크(SNS)에 확산하면서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도서관 측이 보냈다는 문자메시지 캡쳐 사진도 공유됐다. 도서관 홈페이지 등엔 “비치 안 하면 미 중앙정보국(CIA)에 신고하겠다”, “도서관장 해임하라” 등 민원이 이어졌다.
하지만 A 도서관은 희망도서 신청 자체를 받지 않던 시기였다고 반박했다. 같은 자치구의 B 도서관도 신청 내역은 있었지만, 가부 판단을 내리기 전이었다. 결국 A 도서관은 홈페이지에 “스톱더스틸 도서 비치를 거부한 사실이 없다”는 공지문까지 띄웠다. A 도서관을 관할하는 자치구 관계자는 “100개 넘는 민원이 제기돼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출간된 『스톱더스틸』은 2020년 4·15 총선에서 인천 연수구을에 출마한 민경욱 전 의원의 선거무효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내용의 책이다. 저자 중 한 명인 도태우 변호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대리인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이 책은 직전 14주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 종합 1위를 지켰던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한 자치구 사서는 “출간 전부터 이용자들이 스톱더스틸 희망 신청과 문의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 취재진이 서울시 25개 자치구 공공도서관을 상대로 전수조사한 결과, 14일 기준 스톱더스틸 희망 신청 건수는 총 64건이었다. 총 9건의 신청이 들어온 자치구도 있었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확대되는 진원지로 지목된 디시인사이드 미국정치 갤러리에는 “각 지역 도서관마다 스톱더스틸 신간 비치를 요구하고 거부 시 공유해서 민원 넣자” 등 신청을 독려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민감한 정치 현안을 주제로 하는 도서인 만큼 공공도서관과 관련 업계 고심도 깊다. 도서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미풍양속에 반하거나 종교·정치·영리 목적 도서 등은 구매가 제한될 수 있다. 각 도서관의 내·외부 구성원이 참여한 자료선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구매를 결정하기도 한다. 12·3 비상계엄 이후에도 스톱더스틸뿐 아니라 『조국의 함성』, 『K민주주의 내란의 끝』, 『용산의 장군들』 등 정치적 견해가 담긴 책이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에 오른 상태다.
한 자치구 도서관장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하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책만 들이는 건 어렵다”며 “스톱더스틸의 경우 우선 구매 후 이용자들이 읽고 판단하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도서관의 철학적 가치를 제시하는 ‘랑가나단 5법칙’ 중 ‘모든 도서는 이용을 위한 것이다(Books are for use)’란 첫째 법칙을 참조한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도서관계 관계자는 “예산과 공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도서관 정책에 따라 책을 선별해 비치할 수밖에 없다”며 “신청을 거절하면 항의성 민원이 들어오기 일쑤라 수서 담당이 기피 업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서 선정 및 비치 기준을 둘러싼 도서관계의 고민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특히 성 평등이나 과거사, 특정 정치인 등을 소재로 한 도서와 관련한 민원이 잦다고 한다. 앞서 2021년 “5·18민주화운동 참가자들 전체를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던 책 『북조선 5·18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를 서울 시내 한 도서관이 비치하지 않기로 하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자치구 도서팀장은 “악성 민원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사서가 도서 선정 전에 자기검열을 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된다”고 우려했다.
도서관계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8월 한국도서관협회는 ‘도서관 지적자유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지난 14일엔 국가도서관위원회가 도서관생태계특별위원회를 열고,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 김신영 대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한국도서관협회 지적자유위원장)는 “자료 선정과 서비스에서 사서의 개인적 가치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은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사서 역시 다양성·포용성·형평성 등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념·종교·정치적 중립을 견지해야 하며, 지적 자유를 제한하거나 초법적 압력을 가하는 집단에 대해선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근·전율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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