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생 제가 50여 년 소금밭 지킨 이유, 이겁니다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를 유지·발전시키고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이다. 이 연재는 충청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다.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한다. 소금 분야 정갑훈 명인을 지난 13일 만났다. <기자말>
[최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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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
ⓒ 정갑훈 |
음식에 풍미를 더하는 천연원료 소금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존재해 온 귀중한 식탁 위 소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그 안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줍니다.
소금의 역할은 인간관계와도 연결됩니다.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흔히 사람들은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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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갑훈 명인이 운영하는?만대 '솔향기염전'에 쌓아놓은 소금 |
ⓒ 정갑훈 |
한때 그 많던 염전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곳에는 일곱 가지 색깔이 변한다는 칠면초가 지천을 이루고 있습니다. 50여 년 간 소금밭을 지켜내고 있는 저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태 소금 끌대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양질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보면서 "소금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거린다"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염전에서 손을 떼려면 20년은 족히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참 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1948년생입니다. 해방 이후 전쟁의 여파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해기도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는 식량 배급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균형과 부정으로 인해 효과를 보지 못하여 사회적 갈등을 야기 시키기도 했습니다.
엄동설한인 그해 1월 27일, 충남 태안군 이원면 사창리에서 나는 2남 3녀 중 셋째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위로 두 명의 누님은 하늘나라로 가시고, 현재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가족이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 절반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 나이 14살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중한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인생이란, 실패와 성공이 공존하는 복잡한 길이라는 것을 아들에게 가르쳐준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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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기름유출 현장 태안군자원봉사단으로 참여 |
ⓒ 정갑훈 |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는 14살 때부터 집안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과 부지런한 생활습관 덕에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속에서 늘 아버지의 유언이 나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19살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남매를 낳았으며, 뒤늦은 군입대와 제대를 하며 집안 살림살이에 전념을 다 했습니다. 그 당시 고급기술이었던 소 쟁기질, 품앗이, 마을 청년 지도자, 마을 이장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덕분에 1980년 12월 10일, 전두환 대통령 표창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잊지 못할 일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사는 만대마을로 이사 와서 세 사람과 3백만 원씩 동업으로 완도식 김 양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고 꿈을 키워나가던 중, 사업장이 모두 유실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가로림만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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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 분야 정갑훈 명인 |
ⓒ 정갑훈 |
친한 친구가 염전을 소개시켜줬습니다. 당시 염전의 '염'자도 모르는 나이기에 처음에는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퍼뜩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났습니다. 딸린 처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큰맘 먹고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것입니다. 특히 아내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가장으로서, 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나로서는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도전정신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향해 무작정 밀어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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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
ⓒ 정갑훈 |
초창기에는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몸으로만 움직여 일해야 했습니다. 손과 발이 고된 노동에 지쳐 갔고, 소금보다 더 짠 땀방울을 흘릴 때마다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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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전에 새하얗게 모습을 보인 소금 |
ⓒ 정갑훈 |
40여 년간 나와 함께한 동고동락의 염전, 그곳은 나의 삶의 일부이자, 나의 정성이 깃든 소중한 공간입니다. 매일 아침, 햇살이 염전 위로 비추면 소금 결정들이 반짝이며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나는 이곳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며 소비자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염전이 잘 보전되어, 양질의 소금이 많은 소비자분에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정성을 다해 생산한 천일염이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고, 그들이 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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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때까지 염전 일을 하는 것이 남은 꿈이라는 정갑훈 명인 |
ⓒ 정갑훈 |
꿈이라면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내가 사랑하는 염전 일을 죽는 날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에게 소금의 가치를 알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와 충남도청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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