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33) 여배우들의 티타임 | ‘차를 마시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5. 2. 1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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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차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만난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알아두면 쓸 데 많은, 재미있는’ 차 이야기를 술술 읽어나갈 수 있게 풀어낸 스토리텔링 연재물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면 매월 1회 ‘차(茶라)는 렌즈를 통해 풍성한 문화·예술·역사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조안 플로라이트: 내가 나중에서야 관심 갖게 된 것들을 더 일찍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에일린 앗킨스: 난 성질 좀 죽이라고 충고할 거야.

매기 스미스: 아마 충고 따윈 안 들을 테지만 그래도 굳이 찾자면 의심을 거두라고 말해주고 싶네.

주디 덴치: 사랑에 쉽게 빠지지 말라고 말해줄 거야. 너무 한심하잖아.

낚였다. 제목에. ‘여배우들의 티타임’이라니. 그것도 홍차의 본고장이자 ‘애프터눈티’의 발상지인 영국 여배우들이다. 게다가 모두 ‘기사’ 작위를 받은 여배우들. 그래서 영어 제목이 ‘Nothing Like a Dame’이다. 호화로운 왕실 티파티까지는 아닐지라도, ‘Dame(영국에서 남자의 Sir에 해당하는 훈장을 받은 여성에게 붙는 호칭)’의 품위에 걸맞은 근사한 애프터눈티 세팅에 눈호강 좀 하려나 했던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티타임인데 그럴싸한 찻잔과 차도 나오지 않는다. 저그에 담긴 물에 허브와 레몬만 동동 떠 있을 뿐. 일종의 ‘디톡스 티?’ 그 디톡스 티를 연신 따라마시며 네 여배우의 끝없는 수다가 이어진다.

네 명의 여배우는 조안 플로라이트,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그리고 에일린 앗킨스다. 조안이 1929년생, 다른 세 여배우는 1934년생 동갑이다. 영화가 개봉된 때가 2019년이니 90세 조안과 85살 세 여배우의 수다인 셈이다. 평균 연기 경력 64년, 넷이 영화 개봉날까지 출연한 작품 수를 합치면 700여 편,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에미상, 토니상까지 주요 수상만 따져도 총 131회라니. 가히 대단한 여배우들이다.

‘여배우들의 티타임’에서 ‘티타임’은 구색일 뿐. 그녀들의 대화가 주인공이다.
매기 스미스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맥고나걸 교수님으로 유명해졌다. 안타깝게도 2024년 9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주디 덴치는 이름은 낯설어도 얼굴을 보면 “아~”하고 탄성을 지를만큼 유명 여배우다. ‘미세스 브라운’과 ‘빅토리아&압둘’에서 빅토리아 여왕,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오만과 편견’에서 캐서린 공작부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드라고미로프 공작부인 등 유독 여왕과 공작부인 역할을 많이 맡았다. 젊은 시절에는 007 시리즈 사상 최초의 여성 캐릭터 ‘M’ 으로도 출연했다.
영국 왕실에서 ‘Dame’ 작위 받은 여배우 4명 스토리
‘Dame’은 남자의 ‘Sir’에 해당하는 훈장 받은 여성
영화에서 4명의 여배우 젊은 시절의 화려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안 플로라이트는 남편이 그 유명한 로렌스 올리비에다. 1922년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페트루키오’역으로 첫 무대를 밟은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후 영국 최고 남성배우로 자리잡았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 중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어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로 불렸는가 하면 영국 왕실로부터 최초로 ‘sir’ 호칭을 수여받기도 했다. 1931년 ‘폭풍의 언덕’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 역으로 헐리우드에 진출했는데, 이 작품이 대히트하면서 전세계적인 배우로 떠올랐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으로 유명한 비비안 리와의 세기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둘 다 유부녀 유부남이던 시절 사랑에 빠져 이혼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워낙 히스테리컬한 것으로 유명했던 비비안리와 헤어지고 30살 연하 조안 플로라이트와 만나서 다시 결혼했다나.

한국 관객에게 가장 낯선 에일린 앗킨스는 배우면서 동시에 작가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영화에서는 각본가로 활약했다.

그 대단한 여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는 ‘노팅힐’의 감독 로저 미첼. 지난해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퀸 엘리자베스’를 선보였다. 만든 영화들이 지극히 영국적인, 영국 감독이다.

‘티타임’은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유럽에 차를 소개한 이후 계속되어 온, 서구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문화다.

사실 서구 전체라기보다는 영국의 문화라는 게 더 맞아보인다. 단어만 놓고 보면 ‘차를 마시는 시간’이지만, 영국에서는 티타임이 단순히 차를 마시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회자되는 유명한 스토리 중 하나가 영국인의 티타임이다. 세계 제2차대전 중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인 와중에 영국군이 갑자기 전투를 멈추기에 왜 멈추냐고 물었더니, 티타임이라며 차를 꺼내 마셨다는 식이다. 심지어 영국군의 전차나 장갑차에는 홍차를 끓이기 위한 전열 포트가 내장되어 있는가 하면, 홍차는 영국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보급품 중 하나로 알려졌다.

‘티타임’의 한때를 그린 명화도 수두룩하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티타임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몇백년 전 왕족과 귀족들이, 혹은 중산층과 서민이 어떤 찻잔과 다구로 티타임을 가졌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대와 유행에 따라 찻잔과 다구가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다.

유럽산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 이전, 서양 명화에서 티타임을 다룬 그림에 등장하는 다구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제품이다.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 정물화 ‘Tea set(1700년대)’
1700년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스위스 화가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 정물화 ‘Tea set’(L.A. 게티 센터 소장) 속 소재로 차용된 다관과 찻잔에는 전형적인 청나라풍 의상과 헤어스타일의 중국인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1600년대 서양 미술사의 중요한 장르인 네덜란드 정물화에도 중국산 청화 자기가 종종 등장한다. 프랑스 화가 필립 메르시에(1689~1760)가 그린 ‘A Young Woman Carring a Tea Tray: Possibly Hannah’에는 심지어 구우면 갈색이 나오는 독특한 유약으로 만들어진 찻잔이 쟁반 위에 올려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금유’라는 이름의 유약이 있다. 구웠을 때 갈색이나 황색을 만들어내는 유약인데, 당시 동양풍을 흠모한 유럽에서도 갈색이나 황색의 찻잔을 많이 생산했다.
필립 메르시에의 ‘A Young Woman Carring a Tea Tray(1700년대)’ 16~18C 그림에는 중국산 자기가 자주 등장한다.
크기가 아주 작은 중국식 찻잔(티볼)으로 차를 마시는 귀족을 그린 그림도 많다. 작은 중국식 찻잔이 너무 뜨거웠던 유럽인들은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시곤 했다.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신 ‘네덜란드식 차 마시는 법’ 유행
영국 전차·장갑차에는 찻물 끓이는 전열포트 내장돼있어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시는 것은 ‘네덜란드식 차 마시는 법’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가 차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나라면서 동시에 유럽 차 문화가 시작된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는 단면이다. 그냥 찻잔 받침에 차만 따라 마신 것도 아니다. ‘후르륵쩝쩝~’ 소리를 내면서 과장되게 마셨다. 이 같은 문화는 전 유럽에 퍼졌다가 이후 손잡이 붙은 찻잔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티타임 문화를 살펴보다보면 ‘앳 홈(at home)’이라는 단어와 마주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집에 사람을 초대해 간단하게 진행한 티타임을 ‘앳 홈’이라 했다. 주로 점식 식사를 마친 후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가 ‘앳 홈’ 시간이다. 보통 ‘앳 홈’ 때 손님이 머무르는 시간은 평균 15~20분으로 길지 않았다. 이때 여성 손님은 목도리나 스카프는 벗지만 모자와 장갑은 벗지 않는 게 에티켓이었다. 모자와 장갑까지 벗으면 오래 머물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매리 카사트 ‘The Tea(1880)’ 영국 빅토리아 시대 ‘앳 홈’의 한 장면을 그렸다.
22세에 파리로 건너와 유럽에서 여성 화가로 대성한 미국인 화가 매리 카사트는 유독 ‘티타임’ 관련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녀가 1880년에 그린 ‘The Tea’(보스턴 미술관 소장)에는 모자와 장갑을 벗지 않고, 왼손에 찻잔 받침을 들고 오른손으로 찻잔 손잡이를 들어 차를 마시는 여인이 나온다. ‘앳 홈’ 티타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내에서 차를 즐기는 티타임은 이후 실외로까지 이어졌다. ‘피크닉’이다.

원래 피크닉은 프랑스인이 즐기던 ‘실내 파티’를 가리켰다. 영국에서는 이 피크닉이 점차 야외 티타임으로 바뀌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중산층도 피크닉을 즐기기 시작했다. 예의범절을 깐깐하게 고집하던 영국인들은 피크닉에도 다양한 규칙을 정해뒀다. 예를들어 가운데에 깐 러그(하얀 테이블보) 위에는 절대 올라가면 안된다. 러그는 테이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피크닉에 참석한 사람들은 중간에 러그를 두고 그 바깥쪽에 둘러앉았다. 부제가 ‘피크닉’인 제임스 티소의 ‘Holiday’(테이트 갤러리 소장, 1876년경)를 보면 역시 흰색 러그 가장자리에 자유롭게 둘러앉아 차를 즐기는 남녀를 볼 수 있다.

제임스 티소 ‘피크닉(1876)’ 원래 프랑스인이 실내에서 즐기던 ‘피크닉’은 영국에 와서 야외 티타임으로 바뀌었다.
티타임은 거의 없고 커피타임이 대부분인 우리 나라에서도 “차 한잔 할까?”라는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 걸 보면 전세계적으로 ‘티타임’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는 상당해 보인다. ‘여배우들의 티타임’ 질문을 차용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당신은 젊은 시절의 당신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은가?(돌아와 거울 앞에 서긴커녕 아직 돌지도 못했다고? 그렇더라도 그냥 상상해 주시길….)

네 명의 여배우처럼 이름을 널리 떨치지도 못했고 Dame이 되지도 못했지만, 가로막힌 미로 앞에서 갈 길을 찾으려고 애써온 나에게 이런 얘길 해주고 싶다.

“너 정말 수고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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