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33) 여배우들의 티타임 | ‘차를 마시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조안 플로라이트: 내가 나중에서야 관심 갖게 된 것들을 더 일찍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에일린 앗킨스: 난 성질 좀 죽이라고 충고할 거야.
매기 스미스: 아마 충고 따윈 안 들을 테지만 그래도 굳이 찾자면 의심을 거두라고 말해주고 싶네.
주디 덴치: 사랑에 쉽게 빠지지 말라고 말해줄 거야. 너무 한심하잖아.
낚였다. 제목에. ‘여배우들의 티타임’이라니. 그것도 홍차의 본고장이자 ‘애프터눈티’의 발상지인 영국 여배우들이다. 게다가 모두 ‘기사’ 작위를 받은 여배우들. 그래서 영어 제목이 ‘Nothing Like a Dame’이다. 호화로운 왕실 티파티까지는 아닐지라도, ‘Dame(영국에서 남자의 Sir에 해당하는 훈장을 받은 여성에게 붙는 호칭)’의 품위에 걸맞은 근사한 애프터눈티 세팅에 눈호강 좀 하려나 했던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티타임인데 그럴싸한 찻잔과 차도 나오지 않는다. 저그에 담긴 물에 허브와 레몬만 동동 떠 있을 뿐. 일종의 ‘디톡스 티?’ 그 디톡스 티를 연신 따라마시며 네 여배우의 끝없는 수다가 이어진다.
네 명의 여배우는 조안 플로라이트,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그리고 에일린 앗킨스다. 조안이 1929년생, 다른 세 여배우는 1934년생 동갑이다. 영화가 개봉된 때가 2019년이니 90세 조안과 85살 세 여배우의 수다인 셈이다. 평균 연기 경력 64년, 넷이 영화 개봉날까지 출연한 작품 수를 합치면 700여 편,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에미상, 토니상까지 주요 수상만 따져도 총 131회라니. 가히 대단한 여배우들이다.

‘Dame’은 남자의 ‘Sir’에 해당하는 훈장 받은 여성

한국 관객에게 가장 낯선 에일린 앗킨스는 배우면서 동시에 작가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영화에서는 각본가로 활약했다.
그 대단한 여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는 ‘노팅힐’의 감독 로저 미첼. 지난해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퀸 엘리자베스’를 선보였다. 만든 영화들이 지극히 영국적인, 영국 감독이다.
‘티타임’은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유럽에 차를 소개한 이후 계속되어 온, 서구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문화다.
사실 서구 전체라기보다는 영국의 문화라는 게 더 맞아보인다. 단어만 놓고 보면 ‘차를 마시는 시간’이지만, 영국에서는 티타임이 단순히 차를 마시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회자되는 유명한 스토리 중 하나가 영국인의 티타임이다. 세계 제2차대전 중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인 와중에 영국군이 갑자기 전투를 멈추기에 왜 멈추냐고 물었더니, 티타임이라며 차를 꺼내 마셨다는 식이다. 심지어 영국군의 전차나 장갑차에는 홍차를 끓이기 위한 전열 포트가 내장되어 있는가 하면, 홍차는 영국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보급품 중 하나로 알려졌다.
‘티타임’의 한때를 그린 명화도 수두룩하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티타임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몇백년 전 왕족과 귀족들이, 혹은 중산층과 서민이 어떤 찻잔과 다구로 티타임을 가졌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대와 유행에 따라 찻잔과 다구가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다.
유럽산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 이전, 서양 명화에서 티타임을 다룬 그림에 등장하는 다구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제품이다.


영국 전차·장갑차에는 찻물 끓이는 전열포트 내장돼있어
티타임 문화를 살펴보다보면 ‘앳 홈(at home)’이라는 단어와 마주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집에 사람을 초대해 간단하게 진행한 티타임을 ‘앳 홈’이라 했다. 주로 점식 식사를 마친 후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가 ‘앳 홈’ 시간이다. 보통 ‘앳 홈’ 때 손님이 머무르는 시간은 평균 15~20분으로 길지 않았다. 이때 여성 손님은 목도리나 스카프는 벗지만 모자와 장갑은 벗지 않는 게 에티켓이었다. 모자와 장갑까지 벗으면 오래 머물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실내에서 차를 즐기는 티타임은 이후 실외로까지 이어졌다. ‘피크닉’이다.
원래 피크닉은 프랑스인이 즐기던 ‘실내 파티’를 가리켰다. 영국에서는 이 피크닉이 점차 야외 티타임으로 바뀌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중산층도 피크닉을 즐기기 시작했다. 예의범절을 깐깐하게 고집하던 영국인들은 피크닉에도 다양한 규칙을 정해뒀다. 예를들어 가운데에 깐 러그(하얀 테이블보) 위에는 절대 올라가면 안된다. 러그는 테이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피크닉에 참석한 사람들은 중간에 러그를 두고 그 바깥쪽에 둘러앉았다. 부제가 ‘피크닉’인 제임스 티소의 ‘Holiday’(테이트 갤러리 소장, 1876년경)를 보면 역시 흰색 러그 가장자리에 자유롭게 둘러앉아 차를 즐기는 남녀를 볼 수 있다.

네 명의 여배우처럼 이름을 널리 떨치지도 못했고 Dame이 되지도 못했지만, 가로막힌 미로 앞에서 갈 길을 찾으려고 애써온 나에게 이런 얘길 해주고 싶다.
“너 정말 수고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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