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에서 Love로···Z세대, 텍스트힙에 빠지다 [스페셜리포트]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독서 토론을 한다. 이미지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그간 외면받아온 ‘텍스트’가 유행의 한가운데 우뚝 섰다. 텍스트 열풍을 일으킨 건 그 누구도 아닌 1020 젊은 세대다.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던 활자 문화가, 젊은 세대에겐 오히려 신선하고 ‘힙’하게 다가오는 덕분이다.
‘텍스트힙’이 요즘 대세 키워드로 떠올랐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개성 있고 쿨하다는 뜻의 ‘힙’을 합성한 신조어다. 젊은 층 사이에선 책을 읽는 스스로를 ‘멋지다’ ‘뿌듯하다’ 느끼며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트렌드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확산 중이다. SNS에는 독서 기록을 공유하고 오프라인에선 독서 모임을 만든다. SNS도 사진·영상보다 텍스트로만 소통하는 앱이 더 각광받는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텍스트힙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치달은 모습이다.

‘독파민’ ‘오독완’ ‘책꾸’ 등 신조어
텍스트힙 열풍은 젊은 세대가 주로 쓰는 SNS에서부터 확인된다. 인스타그램에 ‘북스타그램’이라는 태그를 걸고 포스팅한 게시글은 600만개를 훌쩍 넘어간다. 보통은 책을 읽는 모습을 인증한다든지,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글귀를 공유하고 짤막한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식이다. 1년에 읽을 책 권수를 정해놓고 독후감을 차곡차곡 업데이트하는가 하면 꾸준히 필사 노트를 게시하는 이도 많다.
텍스트힙과 관련된 다른 신조어도 여럿이다. 독서할 때 오히려 도파민이 나온다는 ‘독파민’을 비롯해 ‘독붐온(독서 붐은 온다)’ ‘오독완(오늘 독서 완료)’ ‘오쓰완(오늘 쓰기 완료)’ 같은 단어가 책 관련 게시글마다 포착된다. 그간 독서 문화를 밀어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SNS가, 요즘엔 오히려 독서를 ‘흥하게’ 하는 채널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1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독후감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는 취업준비생 김가은 씨는 “단순히 과시나 허세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부족했던 지적 호기심을 좇는다고 표현하고 싶다”며 “내 생각을 공유한다는 재미와 나날이 쌓여 가는 게시글을 보고 있자면 계속 책을 읽을 동기부여도 된다”고 말했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텍스트힙은 새로운 세대 등장과 맞물려 있다. 젊은 세대는 항상 새로운, 또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며 “영상과 이미지에 익숙한 윗세대와 단절 혹은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기 세대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평가했다.
다른 이에게 자극을 받아 북스타그램을 시작하는 이도 많다. 이름 모를 타인이나 또래로부터의 자극도 있겠지만, 아이돌 등 젊은 세대에 특히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도 한몫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유튜브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추천하자, 이 책은 지난해 상반기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배우 한소희가 추천한 800페이지짜리 철학 서적 ‘불안의 서’는 출간 10년 만에 돌연 품귀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인플루언서 영향력을 확인한 독서 플랫폼에서도 잇따라 연예인 모델 활용에 나섰다. 밀리의서재에서는 배우 김태리가 소설가 김애란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낭독하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아이돌 그룹 더보이즈(TBZ)의 주연과 트와이스 다현, 배우 강동원은 예스24 캠페인에 참여해 인생작 리스트를 공개하기도 했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역시 텍스트힙,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인 계기가 됐다.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은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를 휩쓸었다. 노벨상 수상 엿새 만에 그의 작품 100만부가 팔려나가는 기록을 쓰기도 했다.
대학가에서도 문학이 대세가 됐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지난해 학부생 도서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7년 만에 처음으로 전공 서적 대출 순위가 10위권 내에서 사라졌다. 대신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롯한 소설이 8권, 산문과 수필이 각각 한 권씩 포진했다. 지난해 고려대 도서관 역시 가장 많이 빌린 책 상위 10권 중 8권이 소설, 이화여대도 9권이 소설이었다.
텍스트힙 열풍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서점가와 문구 업계는 책 표지 등을 취향껏 꾸미는 이른바 ‘책꾸’ 소품을 여럿 내놓으며 매출을 끌어올렸다. 북커버, 인덱스, 라벨 스티커, 책갈피 등이다. 책꾸하기 알맞은 일부 책들 역시 판매량이 급증했다. 표지에 여백이 많거나 단색으로 통일된 ‘문학동네시인선’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위픽’ 시리즈 등이다. 전년 대비 판매가 두 자릿수 가까이 늘었는데 구매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였다.
서점가뿐 아니다. 최근 삼성증권이 최근 고객용으로 펴낸 책 ‘헤리티지 솔루션’에서도 트렌드를 엿볼 수 있다. 초부유층 자산가 고객을 대상으로 절세·부동산 노하우를 정리한 책인데, ‘슈퍼리치도 텍스트힙’이라는 홍보 문구를 전면에 내세웠을 정도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요즘에는 일부러 표지를 단순화하거나 아니면 책꾸에 필요한 스티커를 함께 증정하는 등 이벤트를 기획하는 빈도가 늘었다”며 “이 밖에도 ‘글귀가 좋은 책’ ‘필사에 좋은 책’ 등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는 경향도 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5호 (2025.02.05~2025.02.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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