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총집결... 그 영화관 천장이 무너진 뒤 일어난 일
[윤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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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이리극장의 모습. 이리극장에선 외화를 많이 방영했다. |
| ⓒ 익산시 |
이리좌는 훗날 이리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0년대 들어 두 번째 극장인 삼남극장이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역 앞 가장 번화했던 거리인 '영정통'의 남쪽 끝에 이리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면 삼남극장은 500m쯤 떨어진 영정통 남쪽 끝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공관과 동성극장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당시 극장은 연극과 쇼, 리사이틀에 반공궐기대회까지 벌어지는 곳"이었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민문화회관 역할을 도맡았던 셈이다. 1970년대 이리극장에선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유세를 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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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일극장 |
| ⓒ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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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명보극장 |
| ⓒ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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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아극장의 모습 |
| ⓒ 익산시 |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일극장, 아카데미극장, 명보극장 등 중앙동 곳곳에 새로운 극장들이 들어섰다. 이들은 1980~1990년대 중앙동의 전성기를 함께 했는데, '연극과 쇼, 리사이틀에 반공궐기대회까지' 벌어지던 삼남·이리극장, 시공관과 달리 영화만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영화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삼남극장은 조금 각별하다. 먼저 영정통에서도 가장 사람들로 북적이던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골목에서 태어나 지금도 옛 삼남극장 자리 바로 맞은편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는 김두천씨(61)는 "1970~80년대 삼남극장 앞은 이리극장 앞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라고 했다.
"극장 앞에서 저 익산역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내려다보면 머리들만 둥둥 떠다니면서 아주 새카맸어요. 같은 골목에 산다고 기도(문지기) 형들이 그냥 극장에 넣어주기도 했어요. 이주일, 백남봉, 남보원... 이런 사람들이 쇼단이랑 같이 와서 무대에 섰어요. 잘 생기고 예쁜 영화배우와 가수들, 코미디언, 무용단이 다 같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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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익산 중앙시장 풍경 |
| ⓒ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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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년 11월 이리역 폭발 사고로 천장이 무너져내린 삼남극장의 모습 |
| ⓒ 익산시 |
그래서일까. 십여 년 전 '익산시민창조스쿨 - 7080 익산추억찾기팀'이 익산시민에게 던진 '70~80년대 가장 떠오르는 추억의 극장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삼남극장'이라고 답한 이들이 26.7%로 가장 많았다. 2017년에 나온,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제목도 <삼남극장>(김호경 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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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70년대 익산 삼남극장과 이리극장 등을 운영했던 고 김삼만 대표 |
| ⓒ 김인순 제공 |
김삼만 대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이리극장을 해방 뒤에 불하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7년엔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지어 운영하다가 1960년대 들어 극장을 다른 사람에게 판 뒤 영정통 반대쪽 끝에 다시 삼남극장을 세웠다.
김 대표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익산을 떠났거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맏딸(넷째) 김인순씨가 아직 익산에 살고 있다. 아들 셋에 이어 태어난 김씨는 1957년 이리극장 앞에 붙어있던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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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극장 상영작 홍보물 |
|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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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삼남극장 앞 골목 풍경 |
| ⓒ 김두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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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드라마 <정년이> 포스터 |
| ⓒ tvN |
"영화를 많이 찍을 수 없던 시절이라 배우들도 쇼를 따라 다녔어요. 임춘앵, 박미숙, 김진진 그리고 김희갑, 윤정희, 문희, 엄앵란, 신성일... 드라마 <정년이>처럼 여성 국극도 했죠. 딸이니까 늘 무대 바로 앞에 앉아서 봤어요. 정말 재밌었고,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나훈아나 남진, 혜은이 같은 스타가 오면 기독교방송국에서 나와서 라디오 중계를 했어요. 무대 위에선 화려해 보여도 다들 형편이 넉넉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극장 뒷골목 모정여인숙에서 자고 다음 날 떠나곤 했죠."
영화 필름은 기찻길을 따라 서울에서부터 대전-전주를 거쳐 익산으로 왔다. 밤 11시쯤 마지막 회가 끝나면 다시 기차에 실어 김제 같은 곳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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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남극장 뒷골목엔 지금도 모정장여관이 남아있다. |
| ⓒ 윤찬영 |
중앙동에서 태어난 문성록씨(62)는 중학교 2학년 때 사촌형을 따라 '하춘화 리사이틀'을 보러 삼남극장에 갔다가 이리역 폭발 사고를 겪었다.
"중앙동에 살았으니 쇼나 영화가 시작하고 나면 기도 형들이 들여보내주곤 했어요. 그날 죽을 뻔했죠. 임예진을 하이틴 스타로 만든 영화 <진짜 진짜 좋아해>도 삼남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있고... 다른 애들은 극장 뒤 화장실로 넘어가기도 했는데, 그러다 걸리면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있어야 했어요."
이종진씨(70)도 중고등학교 시절 삼남극장에서 단체관람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혼자서는 극장엘 못 갔는데, 관람료도 부담이었지만 단속을 해서 자유롭게 갈 수 없었어요. 단체관람으로는 외화를 많이 봤어요. <벤허>, <패튼 대전차 군단>이 기억이 나요.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007 문레이커>였어요. 단체관람 땐 관람료가 20~30원이고, 한 반에서 절반밖에 못 봤어요."
삼남극장이 이리역 폭발 사고로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렇지 않다. 정부 보상금으로 지붕을 올리고 다시 몇 년 더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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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남백화점은 다시 뉴타운백화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
| ⓒ 익산시 |
"꼭대기인 6층에 플라자나이트클럽이 있었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양쪽에 두 개를 뒀어요. 익산에서 가장 먼저 스탠드바 크리스탈을 열었고, 경양식레스토랑 티파니도 인기가 좋았죠. 거기서 결혼식도 많이 했어요.
볼링장은 장사가 잘 안됐어요. 캐나다에서 들여온 단풍나무로 바닥을 깔고 레일 밑에선 사람이 손으로 볼링핀을 세웠으니 요금도 비쌀 수밖에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거죠.(웃음)"
삼남백화점에 처음 스탠드바와 나이트클럽이 생긴 뒤로 중앙동 곳곳에 비슷한 가게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폭발 사고로 중앙동에 돈이 풀리고, 씀씀이가 좋던 시절 삼남백화점도 번성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김씨는 "장사가 안돼 부도가 난 걸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대출 사기를 당했다"라고 했다. 누군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주겠다며 접근해 왔는데, 대출금을 챙겨 도망갔다는 것. 김씨 어머니가 수억 원에 달하는 빚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고, 결국 그 빚을 갚지 못해 백화점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김씨 어머니는 2023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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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모델링을 거쳐 문을 연 수요양병원. 건물 외관은 그대로다. |
| ⓒ 윤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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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역 앞 옛 삼남극장 골목 풍경 |
| ⓒ 윤찬영 |
곧 삼남극장이 있던 자리(수요양병원)에서 50m 떨어진 곳에 '문화살롱 이리삼남극장'이 문을 연다고 한다. 이 골목이 다시 사람들로 북적일 날이 올까, 꼭 그럴 수 있길 빈다.
덧붙이는 글 | [참고한 글] 신귀백, "극장뎐(傳)1. 이리극장과 삼남극장", <문화전문지 월간 쿨투라>(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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