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곤의 퍼스펙티브] 트럼프의 함정, 김정은의 딜레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0일, 북·미 관계 전망
트럼프가 지난 23일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겠다는 언급 역시 진심이라면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 여부는 김 위원장에게 달렸다. 그런데 트럼프를 향한 김정은의 속내는 아마도 미움을 넘어 혐오 수준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연이은 러브콜에 미사일을 쏘고(25일), 김정은이 핵 관련 시설을 방문(29일 보도)한 것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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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김정은에 잇단 러브콜
김, 일단 핵시설 방문으로 응수
하노이와 판문점의 굴욕 생생
“최강경 대응” 언급, 미련은 남겨
」
지난 2019년 2월 트럼프가 정상회담을 일방적으로 걷어찬 ‘하노이의 굴욕’ 이후 김정은의 대미 반감은 극도에 달했다. 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은 “내가 이러려고 60시간이 넘게 열차를 타고 왔는가”라며 한탄했다.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활동하다 검거돼 유죄 판결을 받은 ‘충북동지회 사건’에서도 김정은의 당시 심경이 드러난다. 북한이 2019년 3월 12일 평양에서 간첩단에 보낸 지령을 보자. 북한은 “트럼프가 초보적인 예의와 외교 규범도 모르고 안하무인격으로 놀아 댄다”며 그의 “날강도적 본성과 파렴치성”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김정은은 친서(2019년 6월 10일)에서 트럼프를 향해 “여전히 우리 사이의 깊고 특별한 우정이 마법의 힘으로 작용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평양 집무실에서는 하노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런 김정은을 향해 트럼프는 “나는 그와 잘 지낸다”는 메시지를 선거 캠페인 내내 보냈다. 이를 듣는 김정은은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상대방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데 이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우리 관계는 좋으니까 내가 연락하면 받으라’는 트럼프의 메시지는 김정은 입장에선 폭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트럼프도 이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트럼프의 관련 언급은 소통을 위한 시도라기보다 김정은에 대한 압박이고 협상술일 수 있다. 어쩌면 2017년 ‘화염과 분노’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최대 압박’의 시작이자 주도권 쟁탈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트럼프에게 연이어 뒤통수 맞은 김정은
현재 상황은 2019년 6월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을 떠올린다. 당시 트럼프는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내일 DMZ를 방문할 예정인데, 김정은 위원장이 이것을 보고 있다면 만나서 인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썼다. 하노이에서 체면을 구겼지만 김정은은 호응했고 판문점 회동이 성사됐다. 사전 협의도 없이 이뤄진 깜짝 만남에 대다수의 북한 연구자들은 당황했다. 유일 영도체제 하에 최고 권력인 수령 김정은이 미 제국주의 수뇌의 트위터 ‘불림’에 응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외교적 결례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응한 것을 두고 ‘김정은이 트럼프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김정은은 판문점 회동에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트럼프에게 요구했고 트럼프는 “거듭 확약”했다. 하지만 한·미는 예정대로 ‘동맹 19-2’훈련을 진행했고, 트럼프는 훈련 중단 자체를 지시한 바가 없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하노이에 이어 판문점에서까지 ‘속았다’고 생각한 김정은은 청와대를 향해 “삶은 소대가리”라며 화풀이하고 나섰다. 김정은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트럼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가 나를 좋아했다”라는 발언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김정은의 속은 터질 것이다.
감정적인 면을 접어 두고라도 트럼프의 화답은 김정은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취임 첫날 트럼프가 북한을 핵 보유국이라 했지만, 이는 북한 핵의 인정이라기보다 협상을 앞둔 고도의 심리전일 수 있다. 미국이 공식적 표현으로 북한을 ‘사실상(de facto)’ 핵 보유국 혹은 ‘불법(illegal)’ 핵 보유국이라고 언급한 것은 맞다. 하지만 트럼프의 언급이 즉흥적이라는 측면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논란이 커지자 백악관이 지난 28일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집권 1기 때 그랬던 것처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를 추구할 것”이라고 강조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지속해서 천명한 것에 비해 오히려 더 선명한 측면이 강하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지난 24일 상원 인사청문회 언급 역시 마찬가지다. 헤그세스는 트럼프가 사용한 ‘핵 보유국’ 발언을 했지만 그의 발언이 어디에 방점을 두고 있는지 행간을 읽어야 한다. 헤그세스는 “북한 핵과 미사일이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킨다”며 이를 억제하고 대응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강조했다. 헤그세스는 트럼프 1기 때 시작한 미국의 핵 역량 강화, 특히 저위력 핵 무기체계 현대화 사업을 더욱 가속하고,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개선해 “북한 위협에 대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 핵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핵에 대한 대응 능력을 대폭 확충해 북한 핵의 효용성을 낮추겠다는 게 핵심이다. 김정은이 듣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의 이야기인 것이다.
협상의 ‘허들’ 높인 북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과 대북 제재 일부 완화를 맞바꾸는 식의 ‘스몰 딜’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는 우리 입장에선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여기에서 트럼프의 대외 정책이 실질적인 ‘승리’를 추구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 업자 출신인 트럼프는 과정보다는 마지막에 최대한 이득을 남기는 것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빅딜이건, 스몰딜이건 거래 비용을 따져 보면 트럼프가 북한과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은 북한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을 확실히 제한하는 것이다. 미국은 핵을 투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북한이 주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 경로를 포함해 검증할 수 있게 폐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수용할지 의문이다. 미국을 상대로 한 확증 보복 능력 개발을 포기한다면 북한은 미국의 대규모 응징 보복에 노출돼 북한 핵의 효용성은 사실상 소멸된다.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손발을 묶인 상태에서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서로 신뢰가 부족한 북·미가 대화를 재개하더라도 접점을 찾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김정은이 극비에 해당하는 고농축우라늄(HEU) 핵 시설을 공개하고 나선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9월 13일 핵무기 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시설을 현지지도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핵물질 생산 능력을 ‘과시’했다. 북한 매체는 지난 29일 김정은의 핵 관련 시설 방문을 공개하며 그가 “핵 방패의 부단한 강화”를 강조했다고 전했다. 고농축우라늄 핵시설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트럼프가 신고를 요구했지만, 김정은이 거부해 협상이 결렬된 양측의 핵심 쟁점 대상이다. 트럼프 등장을 전후해 연거푸 김정은이 이곳을 방문하며 카드로 꺼내 든 건 미국과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결코 핵 시설 포기는 없다는 메시지다. 협상의 허들을 높여 지난번과 같은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여전히 미국을 의식하는 눈치다. 한 해 전략을 수립하고 공포해 왔던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지난해 말엔 “최강경 대미 대응 전략”을 천명하면서도 이전과 달리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미국 본토 타격용 ICBM 카드도 아끼는 중이다. 트럼프의 불확실성에 먼저 카드를 꺼내지 않겠다는 의도다. 미 본토를 향한 직접적 도발은 트럼프가 2017년과 같이 무력시위로 북한을 최대 압박하고, 러시아와 중국에도 압력을 가해 북한을 억제할 게 뻔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기존 한·미·일 협력을 더욱 강화할 명분을 줄 수도 있다. 트럼프가 대화를 천명하고 나섰지만 김정은이 선뜻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못하는 딜레마다. 김정은에게 트럼프의 귀환은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등장하는 ‘별의 순간’이라기 보다 1기 때 경험했던 ‘굴욕의 순간’을 먼저 떠오르게 할 것이다. 그럴수록 김정은은 트럼프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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