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中 핵심기술·원료로 제품 생산… 하청기지로 전락하는 기업들
<상> 경쟁력 잃은 한국 기업
글로벌 경쟁력을 자부하던 국내 전통 제조업 기업들이 중국 기업의 핵심 기술이나 원료를 사용해 생산한 제품을 ‘메이드 인 코리아’로 둔갑시켜 수출하는 이른바 ‘택갈이’ 통로로 전락하고 있다. 업황 부진 여파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중국 자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 기업은 미국 관세 벽을 피하고, 한국 기업은 쉬고 있는 공장을 돌릴 수 있어 해당 기업들엔 윈윈 전략이다. 하지만 중국의 우회수출 기지화가 본격화하면 관세를 무기로 내세운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통상 마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0일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대기업 석유화학 계열사인 A사는 중국 석유화학 기업인 완화케미컬과 합작법인(조인트벤처) 설립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완화케미컬은 지난해 미국 화학산업 전문매체인 C&EN이 발표한 50대 화학기업 순위에서 매출 기준 전 세계 16위에 오른 대형 석유화학 그룹이다. A사와 완화케미컬 간 협상은 막바지 단계로, 이르면 올 상반기 중 조인트벤처가 출범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인트벤처는 A사의 한 국내 공장에서 완화케미컬의 촉매 기술을 활용한 경화제(화학 반응을 촉진하거나 완료해 재료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는 화학물질)를 생산해 국내외에 판매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양사의 지분율은 50%씩이다.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A사는 조인트벤처를 통해 멈췄던 공장을 돌려 급한 불을 끈다는 계획이다. 통상 석유화학 업체의 이익 마지노선은 공장 가동률 70%대에서 형성된다. A사의 전체 공장 가동률은 2023년 말 60.8%에서 지난해 5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여파로 A사의 지난해 1~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반토막 났다. 생존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A사 입장에선 조인트벤처가 실적 반등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완화케미컬이 얻는 이익은 우회수출로 확보다. 중국 석화 기업들은 수년간 설비투자를 크게 늘렸지만 중국 경기가 부진하며 공급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내수로 소화하지 못하는 물량을 수출로 해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 오는 모든 수입품에 최대 60%의 보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는 큰 부담이다. 더 강력한 관세 정책 및 우회 수입 방지 조치가 예상되는 만큼 자사 화학 제품이 미국의 관세 부과 대상에 오를 것을 대비해 안전한 우회수출로가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해당 공장은 설비 규모가 크지 않다”며 “완화케미컬이 자사 제품이 향후 미국의 제재 대상 품목으로 오를 가능성을 대비해 우회로를 개척하는 차원에서 시도하는 작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불황에 빠진 다른 석화업계 대기업들도 A사를 예의주시하며 택갈이 추진을 저울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미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한 중국 기업의 전략적 제3국 진출 시도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국내 산업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다. 르노그룹은 중국 지리자동차와 컨소시엄을 맺고 ‘폴스타4’를 르노코리아 부산 공장에서 위탁 생산하기로 했다. 국내 주요 로봇 기업들은 자체 생산 역량 없이 부가가치의 핵심 부품을 중국 기업으로부터 들여와 국내 공장에서 조립 공정만 거친 뒤 수출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을 우회로로 점찍은 것은 미국과의 무역장벽이 낮아 관세 회피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대미 무역 환경이 조성된 시장이다. 한 반덤핑 전문 변호사는 “중국 기업의 택갈이가 그간 동남아시아에서 빈번했다”며 “미국이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를 규제하다 보니 또 다른 가까운 시장인 한국으로 눈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서 중국의 택갈이 시도가 본격화하면 향후 중국의 우회진출로를 차단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통상 마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미국 우회조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3국 조립·완성’은 제3국에서 수행되는 공정이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지’ 여부가 핵심이다. 중국 기업의 기술과 부품이 제품 부가가치의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경우 미국의 우회수출 조사에서 우회 거래가 인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A사와 완화케미컬 조인트벤처의 경우 경화제 원료가 현재 미국 수입 시 관세 부과 대상인 데다 완화케미컬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향후 규제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연좌제 가능성이다. 미국의 우회조사 결과 긍정 판정이 내려지면 중국에 부과되는 반덤핑·상계관세가 택갈이가 진행된 해당 국가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택갈이를 한 특정 기업에 대해서만 관세율이 부과되지 않고 그 나라에서 해당 품목을 수출하는 모든 기업에 고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택갈이 사례가 누적될수록 미국의 관세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목표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최근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통한 우회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반덤핑 관세 또는 보조금 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현재로선 멕시코, 캐나다 정도가 트럼프 행정부의 추가적인 타깃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박승찬 중국경영연구소장은 “현재 통상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무역기구(WTO) 기능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과 한국 기업의 결탁을 두고 우회수출로 판단해 불이익을 준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임송수 백재연 황민혁 기자 songst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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