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 실패작인 줄 알았는데, 윤석열이 다시 띄운 정치 드라마

양형석 2025. 1. 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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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기획- 답답한 속 뚫어주는 명장면] 넷플릭스 <돌풍>

[양형석 기자]

굳이 넷플릭스 역대 최고 시청시간 기록을 가진 <오징어게임>을 언급하지 않아도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는 이미 세계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인기 콘텐츠가 됐다. 실제로 통산 누적시청시간 1억 시간을 돌파한 한국 드라마는 15편에 달한다(넷플릭스 TOP10 집계 기준). 여기에 넷플릭스와 TV로 동시에 방영된 드라마까지 모두 합치면 누적시청시간 1억 시간을 돌파한 드라마는 무려 38편으로 늘어난다.

그렇다고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는 한국 드라마가 모두 해외 시청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정해인과 구교환이 주연을 맡았던 군탈 체포조의 이야기 < D.P. >를 들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시즌2까지 제작됐을 정도로 큰 화제가 됐지만 한국의 군대 문화를 모르는 해외 시청자들에게 낯설게 다가왔고, 두 시즌 합쳐 누적시청시간 6400만 시간으로 국내외 온도 차가 제법 있었다.

지난해 6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던 정치 드라마 <돌풍> 역시 설경구와 김희애의 열연과 파격적인 설정으로 많은 화제가 됐지만 누적시청시간은 1620만 시간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넷플릭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드라마로 남는 듯 했는데, 약 반 년 후 새삼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 사태 후 대한민국 정치가 흘러가는 상황이 <돌풍>에 소개됐던 이야기들과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정치 전문 작가의 첫 OTT 드라마
 넷플릭스 <돌풍> 화면 갈무리
ⓒ 넷플릭스
<돌풍>은 권력과 정치 드라마 장르에 특화된 필력을 자랑하는 박경수 작가의 신작이다. 김종학 프로덕션 소속 작가로 활동하며 2007년 <태왕사신기>를 송지나 작가와 공동 집필한 그는 <추적자: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로 이어지는 '권력 3부작'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K-드라마 특유의 러브라인은 없지만 탄탄한 서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뛰어난 완성도의 작품들을 꾸준히 써왔다.

박경수 작가의 첫 OTT 드라마 <돌풍>은 부패한 권력을 뿌리 뽑으려는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분)가 재벌과 결탁한 대통령 장일준(김홍파 분)을 시해하려 하고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분)과 대립하면서 벌어지는 정치투쟁을 다루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장년층 이상의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무거운 정치 드라마를 글로벌 시청자들을 겨냥한 OTT를 통해 제작·공개했으니 흥행이 어려울 만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돌풍>은 OTT에서 제작됐기 때문에 시도해볼 수 있는 수위의 작품이기도 했다. 아무리 드라마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해도 국내 지상파와 케이블·종편 채널에서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설정의 드라마를 편성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OTT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자리 잡은 게 박경수 작가와 <돌풍> 제작진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돌풍>은 한국의 정치에 관심이 없는 해외 시청자들에겐 다른 나라의 낯선 이야기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는 국내 대중들에게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으로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미 연기로는 정점에 올라섰다고 평가 받는 두 주인공 설경구와 김희애는 말할 것도 없고 김미숙과 김홍파, 이해영, 전배수, 김영민, 장광, 박근형 배우까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눈부신 열연을 보여준다.

신념을 바꾸지 않는 정치인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돌풍>에서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정치적 입장, 때로는 신념까지도 수시로 바꾸지만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택한 길을 걷는 인물도 있었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추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자들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나를 위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주인공 박동호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검사 출신으로 재벌의 비리를 파헤치다가 정치보복으로 검찰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박동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장일준에게 스카우트돼 정치에 입문했다. 장일준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는 '장일준의 칼'을 자처하며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과 선거자금 관리를 맡았다. 그리고 장일준의 또 다른 한쪽에는 전대협 문화선전국장 출신 국회의원 정수진이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장일준이 재벌과 결탁하고, 이를 의심하던 박동호의 친구이자 국회의원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정수진과 대립을 시작한 박동호는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거절 당한 뒤, 대통령의 전자담배 액상에 치명적인 마약성분을 타면서 시해를 단행한다. 박동호는 시작부터 '살인미수'를 저질렀던, 도덕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장일준 대통령이 쓰러지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동호는 정수진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갈등을 보이다가 권한대행직을 사퇴하고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국무총리로 내정한 정수진 중심의 정·재계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얼마 가지 못해 국회에서 탄핵 당한다.

위기에 놓인 박동호는 과거 장일준 대통령과 함께 올라왔던 청와대 뒤의 산으로 정수진을 불러낸 후 그녀의 손수건을 들고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다. 정수진이 장일준 대통령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을 인정하지 않자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정수진의 범죄와 비리를 입증한 것이다.

<돌풍>의 박동호는 박경수 작가가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에는 내란 사태로 직무정지된 현 대통령을 비롯해 박동호처럼 검찰 출신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검사 시절부터 정치인의 욕망을 가졌거나 정계 입문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변하게 된 경우가 많다. 박동호의 행동을 두고 '대의를 위해선 뭐든 해도 되냐'는 비판적 평가도 있지만, 정의와 신념을 바꾸지 않는 정치인 캐릭터가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라마 작가도 상상 못한 일이 현실로...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넷플릭스
탄핵, 대통령 권한대행, 조기대선, 헌법재판소... 드라마 <돌풍>에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면 일반 대중들은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을 말들을 최근 두 달 사이 뉴스를 통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만큼 현재 정국은 정치 드라마 전문 작가가 작정하고 쓴 허구의 이야기보다 더욱 긴박하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시해하고 경제 부총리가 중태에 빠진 대통령의 마지막 숨을 끊는 이야기를 쓴 작가조차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을 상상해내진 못했다. <돌풍>에서도 계엄령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는 대통령과 대립하던 세력에서 흘린 정치적 음해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4년 12월 대한민국 국민들은 군인들이 국회의 유리창을 깨고 침투하는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대통령 소환과 체포, 헌법재판소 심리가 이어지면서 대통령 탄핵 절차도 속도를 내고 있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에는 아무리 신념이 강한 정치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심지어 법의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할 법원까지 무력으로 점거하는 세상에서, 올곧은 정치인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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