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밥 같은 게 아닐까요”
유유의 책들은 유유만의 특징이 있다. 표지의 출판사 이름을 보지 않더라도 유유의 책은 금방 알 수 있다. 항상 ‘아담(雅淡)’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표지와 내지 디자인은 물론 내용도 ‘고상하면서 담백하다’.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크기에 200쪽 안팎이고 재생지를 사용해서 가볍다. 외투 주머니에 쏙 들어가니 어디든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도록 ‘적당히 자그마하다’.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단독 건물에 있는 유유의 사무실도 책이랑 닮아 아담했다. 최근 조성웅(51) 대표를 만나 그 ‘아담’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 대표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젖소를 키우셨다. 과수원을 하던 충남 아산에서도 살았다. 그는 “지금도 도시보다는 시골이 좋고, 시골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사무실을 정리하고 파주에 정착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 같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남들이 그렇듯 부모님이 책꽂이에 꽂아둔 위인전은 읽었지만 딱히 책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자라면서 만화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접했다. 무협지에 빠지면서 이미지로 전달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텍스트로 전달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10대 때 동네 만화방의 무협지는 거의 전부 읽었다. 조 대표는 “지금 되돌아보면 텍스트의 세계로 넘어가게 해 준 게 무협지였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무협지는 근본적으로 성장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평범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딱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모범생 정도의 학생이었다. 한문을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대학은 중국어과를 선택했다. 유유의 초반 출간 책들이 중국 고전 분야가 많은 이유였다. 출판사 이름 ‘유유’도 당나라 시인 최호의 ‘등황학루(登黃鶴樓)’의 한 구절 “흰 구름만 천년을 유유히 떠돌 뿐이네(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에서 따왔다. 출판사를 차리겠다고 마음먹고 이름을 지으려고 중국 전국 시대부터 송나라까지의 고시와 산문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 ‘고문진보’를 뒤져 발견한 시라고 한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미국에서 영상을 공부하던 선임병과 친하게 지내면서 꿈이 생겼다. 영화감독이었다. 그동안 영화나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걸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대 후 영화제작 강의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그때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것이 중국 천카이거 감독의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이었다. 조 대표는 “수많은 곡절을 겪고 영화를 만들게 된 감독의 삶이 인상적이었다”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고 말했다.
실무는 영화 제작 현장에서 배워야 하는데 인맥도 없고 업계 진입이 쉽지 않았다.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곳이 방송계였다. 조그마한 프로덕션에서 몇 년간 조연출로 일했다. 해가 갈수록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고민하던 모습을 본 동료가 출판 쪽에서 일해보는 건 어떠냐고 넌지시 말했다. 조 대표는 “항상 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별 생각 없이 한 얘기 같은데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책장의 책들을 뒤져서 속 표지에 적힌 출판사 메일로 무작정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두 군데서 연락이 왔다. 한 곳은 출판사 이름을 잘못 알고 보내서 혼내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면접이나 봐 보자는 생각의나무였다.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판은 생짜였지만 운 좋게 합격했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으로 들어간 출판업계에서 9년 넘게 편집자로 일했다. 그 사이 김영사와 돌베개 등 제법 큰 출판사에서 경력을 쌓으며 책 만드는 일의 매력에 빠졌다. 조 대표는 “매번 새로운 사람(저자와 역자)과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옷을 입히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새로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면서 “또 매번 책을 만들 때마다 독자들에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세상에 이런 직업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연출과 책 편집은 본질에서 상당히 닮았습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조직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은 영화계로 진입하지 못한 것을 천행으로 여깁니다. 영화와 비교하면 책이 만들어 볼 가능성이 훨씬 크니까요.”
이렇게 재밌고 좋은 일을 능동적으로 꾸준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조 대표는 “출판사 구조상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오래 일하기가 어렵다. 회사에서는 경력이 늘어나면 편집자가 관리자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란다”면서 “현역으로 계속 책을 만들려면 창업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2012년 유유가 탄생했다. 1인 출판사였다. ‘중국, 고전, 공부’를 키워드로 잡았다.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을 다룬 ‘단단한 공부’가 첫 책이었다. 쉽지 않았다. 책 한 권을 내서 1500부를 팔아야 어느 정도 수익을 내야 다음 책을 만들 수 있는 구조였다. 그는 “초기에 불확실성을 견디는 일이 많이 힘들었다”면서 “책이 팔리지 않으면 다시 편집자로 다른 출판사에 돌아가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고 말했다.
공부를 주제로 기획한 책들은 어느 정도 팔렸지만 중국 주제의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공부 관련된 책들을 더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 유유의 상징이 됐다. 조 대표는 “독자의 공부를 돕는 책을 만들자는 게 유유의 모토”라고 했다. “기술이 좋아져서 언제 어디서든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정작 사람들이 소통하기는 더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하려면 당사자들의 머릿속에 공통이 되는 이야기, 즉 지식교양이 필요합니다. 지어낸 이야기(픽션)보다는 실재하는 이야기(논픽션)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를 지식교양서로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유유 출판 철학의 방향타가 되어 준 책은 2016년 출간된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였다. 조 대표가 처음 출판계에 입문했을 때 교정 교열을 가르쳐 준 선배였던 김정선씨가 쓴 책. 일반인들도 SNS를 하며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재까지 꾸준히 13만부 정도 팔렸다고 한다. 조 대표는 “이왕 쓸 거라면 정확한 문장을 제대로 쓰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라면서 “김정선 선생님 덕분에 동료 편집자들이 훌륭한 저자가 될 수 있겠다는 깨우침도 얻었다”고 말했다.
조 대표의 애정만큼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책도 있다. 대만 인문학자 양자오가 쓴 책들이다. 양자오는 ‘논어’ ‘노자’ 등 중국 고전은 기본이고 ‘꿈의 해석’ ‘자본론’ 등의 핵심 내용을 역사적 맥락에서 흥미진진하게 풀어쓰는 이야기꾼이다. 벌써 양자오의 책만 23종을 만들었다. 조 대표는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어려운데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면서 “한 권만 읽어 보면 저자의 다른 책도 꼭 찾아 읽게 될 거라 장담한다”고 말했다.
유유를 만든 지도 어느덧 14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240여종의 책을 만들었다. 그사이 출판 환경은 팍팍해졌다. 그래도 책의 가치를 믿고 있다. 조 대표는 “믿고 볼 수 있는 핵심이 되는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책을 통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출판의 미래는 이런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얼마나 늘릴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그에게 책이란, 좋은 책이란 무얼까. 그는 “밥을 든든하게 먹고 나면 기운이 돋고 살아갈 힘이 난다”면서 “책은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밥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거칠고 모난 일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도 생기고 여려지는데, 이런 마음을 다독이고 단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책입니다.” ‘좋은 책’은 고통스러운 일상을 이겨내고 버틸 수 있도록 사람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는 게 조 대표의 생각이다.
파주=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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