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철학자, 90세 배우의 대상 수상이 전해준 묵직한 감동
[이준목 기자]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 미국의 캐서린 헵번은 60대 이후에도 세번이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공로상이 아니라 연기상이었다. 연기를 잘하면 나이가 60을 먹어도 상을 주는 거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된다."
평생 뼛속까지 배우로 살았던 90세 노장의 감동적인 고백이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했다. 1월 11일 방송된 < 2024 KBS 연기대상 >에서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이 드라마 <개소리>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대상 역사를 통틀어 공로상이나 사후 수상을 제외한 현역 최고령 수상 기록이기도 하다.
2024 < KBS 연기대상 >은 당초 지난달 12월 31일 생방송 예정이었으나 29일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애도에 동참하기 위해 한 차례 편성을 취소했다가 이번에 녹화로 방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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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KBS 연기대상 >의 한 장면. |
ⓒ KBS |
이순재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이던 1956년 대학 연극 동호회에서 연극 <지평선 너머>를 공연하며 연기자의 길에 처음에 입문했다. 방송을 통한 공식 데뷔는 1961 년 KBS의 첫 TV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하며 KBS와 한국 TV 드라마 탄생의 역사적인 첫 순간을 함께했다.
이후 <사랑이 뭐길래> <허준> <보고 또 보고> <목욕탕집 남자들> <이산> 등 수많은 걸작 드라마에서 눈부신 연기들을 선보이며 국민 배우, 국민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때 뛰어난 연기력이나 스타성을 지니고도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는 유명 배우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순재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을 통하여 농익은 와인처럼 나이가 들어서 더욱 무르익은 대배우로 거듭났다. 본래 흡연자였던 이순재가 1982년 대하드라마 <풍운>의 대원군 역할을 연기하면서 나홀로 4분 스피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하여 단행했던 금연을 40여년째 지켜온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덧 현역 최고령 배우임에도 왕성한 연기활동을 이어가고있는 이순재는 지난해는 무려 89세에 외국배우인 앤소니 홉킨스, 이언 맥컬런 등을 제치고 역대 전 세계 최고령 <리어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 가천대 석좌교수로 13년째 근무하며 연기 후학들도 지도하고 있다. 2025년으로 이순재는 어느덧 데뷔 70년 차를 맞이했다.
지난 2024년 방송된 <개소리>는 인생 2막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그린 휴먼 코미디 드라마다. 이순재는 언제부터인가 개의 목소리가 사람의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한 노배우의 역할을 맡아, 실제로도 본인의 이름과 인생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자전적인 캐릭터를 호연했다.
사실 이순재는 <개소리>촬영 중 건강 악화를 겪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으며 드라마 방영 중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띄게 더 노쇠한 모습으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연기 투혼을 선보이며 많은 대사량과 난이도 높은 코믹 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노장의 저력을 증명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드라마는 비록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이순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노년 세대와 1세대 원로 배우들에 바치는 일종의 헌정 드라마이자, 자극적인 이야기에 지친 시청자들을 위한 따뜻한 힐링 드라마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반세기 넘게 수많은 걸작들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이순재였지만, 그동안 대상과는 유독 인연이 없다는 징크스로 유명했다. 1970년 TBC연기대상, 2007년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MBC방송연예대상을 수상한 바 있지만, TBC는 1980년대 언론통폐합으로 기록이 모두 사라졌고 MBC 대상은 시트콤이 예능으로 분류되면서 연기대상이 아니라 연예대상으로 수상하면서 모양새가 다소 이상해졌다.
이순재 본인도 "그렇게 오래 했는데 40년여간 대상 한번 못 받았다"며 농반진반으로 아쉬움을 나타낸 바 있다. 그렇게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대상의 기회는 무려 90세에 운명처럼 결국 이순재를 찾아왔다.
이순재의 이름이 대상으로 호명되자 후배 배우들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로 대선배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시상대에 오른 이순재는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다"라며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이순재는 "제 기억으론 KBS가 대한민국 방송의 역사를 시작한 해가 1961년도 12월 31일이다. 그 후에 KBS 작품에 많이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며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상, 귀한 상을 받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으로 이순재는 미국의 명배우 캐서린 헵번을 언급하며 60대 이상 노배우들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오지 않는 우리 방송가의 현실에 소신 발언을 날리기도 했다 "그동안 대상을 받게 되면 역사적 인물들이 많이 받았다. 우리 최수종 씨(시상자)는 4번씩 받았다. 미국의 캐서린 햅번 같은 배우는 30대 때 한 번 타고 60대 이후에 세 번 탔다. 우리 같으면 전부 공로상이었을 거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라고 언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이 상은 나 개인의 상이 아니다. <개소리>에는 우리 소피를 비롯해서 수많은 개가 나온다. 그 개들도 한 몫을 다 했다. 거제를 가려면 4시간 반이 걸리는데 20회 이상 왔다 갔다 하면서 찍은 드라마"라고 함께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또한 이순재는 제자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가천대 석좌교수로 13년째 근무하면서 학생들 한명 한명을 다 지도하고 있다. 이번 드라마 촬영 때문에 도저히 학생들을 가르칠 시간이 안 맞더라. 그래서 학생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난 교수 자격이 없다'고 사과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이순재는 "그럼에도 학생들이 '염려 마십시오.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가 다 만들어 내겠다'고 하더라. 눈물이 나왔다. 그 학생들을 믿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의 결과가 온 걸로 알겠다"며 스승을 배려해 준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순재는 "시청자 여러분,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합니다"라고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후배 배우들의 기립박수
말 한마디마다 묵직한 울림이 전해지는 대배우의 진심 어린 고백에, 객석에서 지켜보던 여러 후배들도 눈시울을 붉혔고 아낌 없는 기립박수를 보내며 축하했다.
어느 사회, 어느 분야이든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의 존재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90세의 이순재의 최고령 대상 수상은 후배들에게 본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모범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2014년 예능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을 당시 이순재는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나 받으려고 주저앉아 버리면 늙어버리는 거다. 난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거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쭉 가면 되는 것"이라는 어록을 남긴 바 있다.
또한 2024년 출연한 <유퀴즈온더블록>에서는 "우리가 태어나는 조건은 각자 다르다.넉넉하거나 부족하게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나게 한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연기다."라며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메세지를 남긴 바 있다. 이순재의 삶과 연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변함없는 감동을 주는 이유도, 그가 평생 실천하며 지켜온 이런 철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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