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생각나는 소설
[김명주 기자]
" 아버지가 조금 전에 숨을 거두셨대."
아침 운동을 나갔던 남편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나에게 안겨와 엉엉 운다. 작년부터 아버지의 심장에 무리가 왔다. 최신 심장 세동기를 달고, 가족들이 극진히 보살폈지만, 연로하신 터라 체력이 그 과정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들 형제들이 돌아가며 아버지 곁을 맴돌았고, 내 남편도 지난주까지만 해도 시간 날 때마다 고향집에 가서 병원 기사노릇 하고, 부모님 말벗이 되어드리곤 했다. 시부모님 두 분은 같이 웃다가, 토라져 서로 삐치기도 하고, 끝에는 따뜻한 차에 비스킷 한쪽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그런 결혼 58년 차 부부였다.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을 담담하게 치르셨다. 순간순간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그마저도 남이 보기 전에 얼른 닦아내고는 하셨다. 이후 남은 이들의 삶 속에 남편이자 아버지의 빈자리는 언제나 함께였고, 가족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그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다. 나 또한 남은 자의 아픔에 집중하고 있던 차였다.
자식이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스웨덴을 배경으로 펼쳐진 인생의 의미와 관계, 사랑에 대한 이야기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
ⓒ Yes24, 출판 북파머스 |
'보'는 가정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아침이면 먼저 목을 꽉 막고 있는 가래침을 뱉어낸다. 그런 다음 화장실을 가기 위에 일어나야 하는데, 밤새 뻣뻣해진 근육과 어지러운 균형감각을 찾느라 한참 걸린다. 그러다 바지에 오줌 실례를 하기 일쑤다.
요양보호사들은 기저귀를 차고 계시라 말하지만,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입맛이 변했는지 즐겨 먹던 생크림 케이크는 비위에 거슬리고, 소화가 잘 되는 수프 정도를 삼킬 수 있다. 손가락이 퉁퉁 부어 찻잔도 놓치곤 한다.
'보'는 세상을 떠난 아내가 그리울 때면, 아직 체취가 남아있는 스카프를 만지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런 그에게는 애완견, '식스틴'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밤이면 함께 잠이 든다. 식스틴은 '보'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마치 한 몸처럼 교감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외아들 '한스'는 아버지 '보'의 안녕을 챙기느라 바쁘다. 아들의 유년 시절 버릇, 습관을 너무나 잘 아는 아버지는 며느리와 이별 후 딸아이를 돌보며 회사 생활에 아버지 챙김까지, 피곤함이 역력한 아들 모습에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요양보호사 '잉그리드'는 꼭 아내를 생각나게 하는 따뜻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50년지기 '투레'는 이미 보보다 먼저 요양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직접 만나기는 어렵지만, 전화통화로 옛 추억, 아들 한스에 대한 불만 등 마음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다.
애견 식스틴을 산책시키는 일상이 힘들어지고, 요양보호사들에게 그런 일까지 맡길 수는 없는다는 이유로 아들 한스는 매번 아버지를 설득하는 중이다. 이제는 애견을 다른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이다. 식스틴이 보에게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는 아들 한스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괘씸하고 화가 난다. 내 안위를 보살핀다는 녀석이 내 속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다.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다. 아내와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집은 환자의 요양보호에 적합한 물건들로 바뀐다. 나에게 익숙하던 물건, 공간, 사람, 애완견까지… 낯설고 원치 않는 변화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에, 내 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보'는 좌절한다.
"나는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본문 p.189
'보'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관계가 소원했던 아버지, 그에 반해 애틋했던 어머니와의 추억.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보'는 삶을 되새기고 용서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 석양 무렵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 석양 무렵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 |
ⓒ Pixabay |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등장인물이 많고 특유의 번역체가 눈에 자꾸 밟혀 스토리에 빠져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책의 말미,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떠나가신 아버지 생각에 푹 빠져든다.
하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가 집에 병문안을 왔다. 함께 담소를 나누다가 어머니가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그 두 분이 하시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한다. "난 이제 떠날 준비가 됐어. 하지만 내 아내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아." 부부는 어느 한쪽이 먼저 떠난 이후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준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닥친 이별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최근 몇 년간 아버지는 옛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2차 대전에 참여했던 아버지, 외아들에게 헌신했던 어머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누이 이야기. 열심히 부부가 일해가며 아들 넷을 키우던 젊은 시절. 그간의 추억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평소처럼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하신 그 말씀들이 결국 생의 마지막,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그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식들이 편찮으신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아버지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했었는지 소설 속 주인공 '보'의 시선을 통해 되돌아본다. 혹여나 부족하거나 넘쳐,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았을지 말이다. 재작년 크리스마스날 밤, 아버지는 이런 얘기를 하셨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있고, 아들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무탈하게 삶을 잘 꾸려가고 있고. 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지 몰라."
'혼자되신 어머니, 자주 찾아 뵙고 안부 여쭈면서 곁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평안히 쉬시라.' 다시 한번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는 이 소설을 음미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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