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도 희망을 주고 간 ‘금빛 영웅’

박은주 2025. 1. 10.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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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저장소] 기억 ⑧ <끝> 4명에 새생명… 前 여자 하키 국가대표 박순자씨
[기억저장소]는 생의 마지막 순간, 다른 이에게 생명을 전하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소중했을 그들의 삶을, 가족과 친구·지인들의 기억을 통해 기록하고 꼭꼭 담아 오래 보관하고자 합니다.

여자 하키 국가대표 출신으로 지난해 11월 30일 장기기증을 통해 4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난 박순자씨의 생전 경기 모습. 유족 제공

“키는 작아도 발이 어찌나 빨랐던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내달리던 동생 박순자(사망 당시 58세)씨의 작은 발을 오빠 성규(64)씨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야무진 그 발로 동네 곳곳을 누비던 동생은 고등학생 무렵 여자 하키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품에 안았다. 성규씨는 지난 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재빠른 발로 상대 선수들의 틈을 파고들던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순자씨는 지난해 11월 30일 경희대학교 병원에서 심장, 폐, 간, 좌·우 신장을 기증해 4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약 두 달간 원인불명의 두통에 시달리다 뇌출혈이 왔고, 끝내 뇌사판정을 받았다. 성규씨는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동생과 이렇게 빨리 이별하게 될 줄 몰랐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육상 꿈나무에서 하키 국대까지

순자씨는 경기도 평택 오성면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논을 중심으로 집 네 채가 둥그렇게 자리한 소박한 곳이었다. 성규씨는 “집집마다 애들이 서너명씩 있었는데 어두워지면 할 게 없으니까 이어달리기를 했다”며 “그때마다 순자를 이기는 애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도 1등 상품으로 공책을 한아름 들고올 만큼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순자씨는 중학교에 진학하며 육상선수가 됐다. 뛰어난 재능 못지않게 열정도 넘쳤다. 성규씨는 “밥 먹고 나서도 뛰고, 하여튼 틈만 나면 뛰었다”며 추억에 잠긴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랬던 육상 꿈나무가 하키에 입문한 건 평택여자종합고(현 평택여고)에 진학하면서였다. 순자씨와 같은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대표팀 동료 서효선(59)씨는 “순자도 저도 체육 선생님 권유로 하키를 시작했다”며 “순자가 운동을 참 잘했다. 대표팀에도 저보다 먼저 발탁됐다”고 회상했다.

키가 160㎝에 불과했던 순자씨는 대표팀 선수 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도 빠른 속도로 볼을 컨트롤하며 골을 넣는 능력이 탁월해 별명이 ‘여우’였다고 한다. 포지션은 공격을 담당하는 레프트윙. 수비수인 효선씨와 호흡이 잘 맞았다. 영국과 맞붙었던 서울올림픽 4강전에서도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 덕분에 1대 0으로 결승행 티켓을 따냈다.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강팀인 호주에 패하며 은메달에 그쳤지만, 효선씨는 순자씨와 공을 주고받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진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딸, 동생, 엄마

평소 등산을 즐기던 박씨가 산 정상에 올라 미소를 짓고 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거머쥔 박씨는 은퇴 후에도 실내사이클 등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유족 제공

2남 3녀 중 막내였던 순자씨는 성규씨에게 ‘누나 같은 동생’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강도 높은 운동을 해서인지 동생은 언제나 강인한 모습이었다. 자랑스러운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서울올림픽 때 동네 사람들 15명 정도가 저희 집에 모여 경기를 같이 봤다”며 “그 좁은 방에서 다 같이 소리 지르고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다”고 말했다.

당시 매 경기 주전으로 나오거나 골을 넣는 동생이 대견해 성규씨는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고 한다. 행여 딸이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됐던 어머니는 문밖에 서서 중계 소리만 겨우 들었다. 아버지는 경기 다음 날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을 나가며 “우리 딸 은메달 땄다”고 콧노래를 불렀다.

대표팀 후배들은 순자씨를 다정했던 선배로 기억했다. 대표팀 7년 후배인 선모(54)씨는 “언니가 먼저 말도 걸어주고 대표팀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려줘서 참 고마웠다”며 “은퇴한 뒤 서로 연락이 뜸해질 수도 있었는데 항상 언니가 안부를 물어봐줘서 최근까지도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 효선씨도 “힘든 내색도, 반대로 자랑도 잘 안 하던 속 깊은 친구”라며 “하나뿐인 아들이 1년 전 세무사에 합격했는데 그 소식도 한참 지난 뒤에야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고 했다.

순자씨의 ‘하나뿐인 아들’ 김태호(33)씨는 엄마에 대해 “친구 같으면서도 엄격했고, 언제나 멋있었다”고 표현했다. 순자씨는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뒤 체육 교사를 꿈꿨지만, 상황이 여의찮아 영업직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평생 해오던 운동과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팀장까지 도맡을 정도로 책임감이 투철했다. 운동도 쉬지 않았다. 평일에는 퇴근한 뒤 실내사이클을 탔고, 주말이면 전국 각지로 등산을 하러 다녔다. 한 스포츠웨어 브랜드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을 4년에 걸쳐 모두 등반하기도 했다. 지난해 한강 철인3종경기와 서울평화마라톤 10㎞도 완주했다. 태호씨는 “엄마와 자전거를 타고 서울 잠실에서 경기도 하남까지 달리곤 했다”며 “조깅도 자주 했는데 ‘그게 뛰는 거냐’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고 말했다.

기쁨 나누고 간 ‘금메달리스트’

이처럼 건강했던 순자씨였기에 갑작스러운 비보는 가족에게도, 지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순자씨는 지난해 9월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후 병원에서 두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각종 검사를 받던 중 지난해 11월 21일 수영장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된 순자씨는 급히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또 한 번의 뇌출혈이 일어났고, 끝내 뇌사 판정을 받았다.

가족들은 순자씨의 생전 뜻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순자씨는 오빠 성규씨에게 종종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태호씨도 언젠가 TV 다큐멘터리를 보던 엄마가 장기기증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료 효선씨는 “순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과거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장기기증을 했었다”며 “아마 순자가 그때의 기억 때문에 장기기증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태호씨는 “엄마를 떠나보낸 뒤 슬픔을 넘어 고통 속에 지냈다”며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이었고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엄마라면 내가 씩씩하게 이겨내길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성규씨는 “형제들에게 ‘순자는 하늘나라에 가면서도 금메달을 따고 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며 “금메달로 국민들에게 기쁨을 줬던 동생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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