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의 시선] 김정은이 웃고 있다

유지혜 2025. 1. 7.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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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부장

지난 3일 동해 상에서 올해 첫 해상훈련에 참여한 광개토대왕함(3200t급 구축함)의 함포가 가상의 적함을 향해 굉음과 함께 불을 뿜었다. 비슷한 시각 서해에서는 천안함(3100t급 호위함), 남해에서는 경남함(3100t급 호위함)을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실사격훈련과 전술 기동훈련이 진행됐다.

새해가 되면 으레 실시하는 정례 훈련이지만, 올해는 유독 반가웠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 이후 처음 우리 군이 대규모 훈련을 진행하고 이를 공개해 해상 방위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 계엄 여파 군 대비태세 우려
‘삼류 지휘관’들, 군 욕보여
“국민에 충성” 초심 새겨야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기사에 습관처럼 써왔던 ‘확고한 대비태세 유지’라는 표현이 요즘처럼 무겁게 다가오는 때도 없다. 계엄 사태로 직무 정지된 장성(진급 예정자 포함)만 9명, 계급장 별의 숫자는 19개에 이른다. 대부분 대북 억지 및 도발 대응, 수도권 방어 등을 맡는 핵심 직위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겐 이런 호재가 없다. ‘즉·강·끝(즉각·강력히·끝까지)’ 응징을 외치던 인사들은 알아서 제거됐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이 무슨 짓을 벌여도 한국은 나설 여력조차 충분치 않다. 김정은으로선 마음 편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곧 들어설 트럼프 2기 미 행정부 대비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됐다. 간헐적 도발을 감행하며, 그는 아마 웃고 있을 테다.

김정은이 웃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군의 리더십 부재 때문이 아니다. 계엄 사태로 흐트러진 군의 기강과 바닥에 떨어진 군의 사기가 더 큰 문제다.

계엄 직후인 지난달 6일 계엄군을 지휘한 곽종근 특수전사령관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은 야당 의원이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고해성사’를 했다. 이제서야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는 따르지 않았다”거나 “(2차 계엄)지시가 하달돼도 거부하겠다”는 항변은 기가 찼다. 계엄에 성공했다면 떳떳하게 공훈을 챙겼을 이들이 부하들에게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투입돼 ‘계엄군’이라는 수치를 떠안아야 하는 것도, 육군사관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도 그들이 아니다. 이제 군의 정당한 대북 억지 활동에도 서슴없이 ‘북풍 몰이’라는 색 입힌 렌즈를 들이댄다. 정상적인 경계 활동을 위한 부대 이동도 불순한 목적의 동원인 양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잠시 시계를 2020년 6월 미국으로 돌려보자. 흑인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격화하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반란법’을 발동해 연방군 투입을 밀어붙이려 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이를 공개 반대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뿐 아니라 전직 군인으로서도 말하건대, 현역군을 법 집행에 투입하는 선택지는 가장 긴급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항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당시 세인트존스 교회를 찾아 성경을 들고 서 있는 ‘인증샷 이벤트’를 벌이기 위해 평화 시위대를 최루탄 등을 동원해 해산시켰다. 그의 의도를 모른 채 수행한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직후 국방대 졸업식 메시지에서 이를 후회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자체가 군이 국내 정치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줬다. 나는 거기 있어선 안 됐고, 제복을 입은 장교로서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 사과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우리에게 에스퍼나 밀리 같은 지휘관이 없었던 것은 불행이다. 하지만 우리 군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점은 다행이다.

지금은 신뢰받지 못하고 있지만,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집중 총격에 끝까지 응전하다 20㎜ 벌컨포 방아쇠를 잡은 채 전사한 조천형 상사, 황도현 중사와 같은 그 군이다. 2015년 8월 수색 중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를 밟아 자신의 두 다리가 크게 다친 것을 눈으로 보고도 끝까지 총을 잡고 북한군을 찾아 맞서려 한 하재헌 예비역 중사와 같은 그 군이다. 연말 무안 제주항공 참사 현장에서 총이 아닌 호미를 손에 들고 희생자들의 유류품 한 점도 놓치지 않기 위해 현장을 파헤치고 또 파헤친 특전사 장병들과 같은 그 군이다.

언제나 답은 초심에 있다. 군인이 입영하거나 장교가 임관할 때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다”고 선서한다.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권력자가 아닌 ‘국가’와 ‘국민’이다. 이를 잊는 순간 후배와 부하들을 욕보이고, 정치인 유튜브에 나가 눈물을 짜내는 삼류 지휘관, 삼류 군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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