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비상계엄이 44년 만에 날벼락처럼 선포되면서 1987년 헌법 체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한순간에 얼마나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지 만천하에 보여줬다. 브레이크 없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폭주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87년 헌법 체제에서 모든 대통령이 가족이나 친인척 비리로 인하여 고통을 겪었고, 3명의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어 직무정지를 당했다. 대통령 개인의 일탈도 문제이지만 제도가 역사적 수명을 다했다고 진단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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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반영 못하는 87년 헌법 체제
개도국 때 제정, 역사적 수명 다해
차기 대선에서 국민투표로 고쳐야
」
나를 비롯한 역대 국회의장들이 의욕적으로 개헌을 추진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이야말로 개헌을 완성할 적기이다. 지식인,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개헌에 공명하는 울림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유력 대선주자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인 우리 헌법은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뽑겠다는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국민이 직선제를 선택한 이후 38년째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렀지만, 지금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뤄내며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문화 강국으로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헌법만이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낡은 구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다. 마치 대학생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글로벌 패권경쟁 시대를 맞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들 국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수백 년의 축적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반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 시스템을 운영한 경험이 대단히 짧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취약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주어진 법적 권한을 신중하게 행사하는 ‘제도적 자제’만이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 형편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제도화하는 개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본다.
지금까지 대통령이나 국회 차원에서의 여러 차례 개헌 시도는 실패했다. 그 원인은 우리 헌법이 지나치게 고치기 어려운 경성헌법이라는 점과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내용을 고치려고 하는 과욕에 있었다. 현실적으로 유권자 과반이 투표하고 그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국민투표 요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다.
나는 여야를 포함한 국민 대부분이 ‘이건 오케이’ 할 정도의 내용만을 담는 ‘최소 개헌’을 제안한다.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여야 모두 1호 공약으로 내건 저출생 대책의 헌법 명문화 논의부터 시작해 개헌 열차를 출발시키자는 것이다. 국가 소멸 위기 극복을 위한 ‘저출생 개헌’은 국민의 명령이기도 하다. 일단 개헌 열차가 출발하면 어떤 내용을 추가로 더 담을 것인가는 여야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 이미 합의한 바 있는 5·18 민주화운동의 헌법전문 수록을 비롯해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대통령 4년 중임제 도입 등은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4년 중임제의 경우에는 국정의 책임성과 연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중장기 과제 해결을 가능케 해 국가경쟁력 확보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여기에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이뤄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야가 정치권 안팎의 인재를 찾아 총리 후보를 추천하는 ‘책임총리제’를 도입한다면 총리가 국회의 뜻을 행정부에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민의를 통해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할 시간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후에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차기 대선에서 반드시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진행해야 한다. 이번 기회를 날리게 되면 개헌은 또 수십 년 미뤄질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개헌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여야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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