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예술 스며드는 문화, 탈출과 발버둥의 미학"

최방식 2025. 1. 4. 11: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8)] 이송 문화예술기획가

[최방식 기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춤 잘 춘다고 아버지가 춤꾼 하라고 해 시작했죠. 예고와 대학에서 춤을 공부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어요. 춤사위로 희노애락을 다 표현할 길이 없는 거예요. 어딘가 갇힌 답답함. 뛰쳐나왔죠. 문화(예술)기획으로 틀었어요. 대중 속으로 스며드는 길을 찾아. 전통예술을 되살려보자는 발버둥이었죠. 힘겹지만 쭉 해봐야지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여덟 번째 주인공 이송(57) 문화예술기획가의 말이다. 3일 경기도 광탄(양평)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자기 삶을 '탈출'과 '발버둥'이라 했다. 춤으로 못다 푼 문화향유권, 장르 뛰어넘기가 불가피했단다. 전통예술을 돈 아닌 문화가치로 자리매김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고.

"제가 한국 춤을 배우며 가장 힘들었던 건 '정재'(呈才=재능을 뽐낸다는 뜻을 넘어 헌재(獻才=왕에게 재능을 바친다) 뜻으로 바뀜) 춤사위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어요. 일제강점과 서구화가 분절한 우리 삶에서 전통문화를 살리는 게 가망 없어 보였거든요. 우리춤을 궁금해하는 이가 대학입시생 빼면 드문 현실, 캄캄했으니까요."
 이송 문화예술기획가.
ⓒ 최방식
춤꾼, 그들만의 리그를 박차고 나와

춤꾼, 그들만의 리그를 박차고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전통 춤사위를 넘어서기로 했다. 먼저는 신무용이었고, 창작춤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춤(한국) 그 자체로 대중 삶 속 파고들기엔 역부족이었다. 문화(예술)기획으로 방향을 틀었다. 찾아가는 예술, 스며드는 문화를 붙들려는 발버둥이었다.

"서울 살 땐 국립극장, 정동극장 등에서 일하며 창작 춤을 기획하고 연출하며 뿌듯해했죠. 시골(양평)로 내려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서울사람들의 문화였어요. 그들 중에서도 향유할 수 있는 이들만의 호사(?)였고요. '전통예술 진흥' 구호가 공허하기만 했죠. 그때 깨달았어요. 문화(가치)로 바꾸려면 무언가 필요하다는 것을."

현장 속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홀몸노인·홀부모·이주노동자 사회, 마을공동체, 시골의 작은 학교에 도대체 어떤 갈등과 고민이 있는지, 그들은 무슨 가치를 공유하고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 지를 찬찬히 샅샅이 뒤져보기로 한 것. 거기서 발굴한 예술 가치를 문화화하자는 것.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 쉽지 않죠. 인간이 제아무리 물길을 만들어도, 폭우엔 별무소용이듯. 물은 제멋대로 길을 내고 흘러가니까요.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문화도 자기만의 길이 있다고 봅니다. 그걸 찾는 게 제 사명이랄까요. 메마른 땅에 소나기가 잘 스며들듯이요."

그가 전통춤을 시작한 건 '끼'를 가졌던 아버지의 권유 때문. 음악만 흘러나오면 몸을 곧잘 흔들어대는 딸을 봐왔기 때문. 초등학교 5학년 때 춤(발레) 학원에 다니게 됐다. 학원이 1년만에 문 닫아(이사) 중단했고, 아쉬웠던 아버지는 뒷날 그를 국악고에 입학시켰다.

"애기 때 '끼'를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복주머니를 둘러매 시골에 보내면 잔뜩 채워왔데요. 늘 용돈을 넉넉히 벌 정도로 춤을 잘 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능이 있었는지, 그리고 남 앞에서 춤을 잘 췄는지, 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그는 등 떠밀려 국립국악고를 거쳐 대학에서 한국춤을 공부했다. 그런 그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전통 답습이 무슨 예술이냐는 것. '갇힌 느낌'이었다. 마침 탈출구가 생겼다. 87년 투쟁 때인데 학생회장(과)으로 당선되고 반은 학교, 반은 거리(주로 시청 시위)로 쏘다닌 것. 학내갈등으로 교내 농성도 주도했다. 유급 위기 등 갈등을 겪으며 사회를 보는 눈을 넓힐 수 있었다.

"춤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고민했어요. 한계에 부딪힌 춤, 버리지 말고 틀을 뛰어넘자는 것이었어요. 배추를 소금에 절여야 김치를 담그듯, 춤(예술)을 문화화할 '소금'을 찾자는 것. 석사논문 주제도 그 내용으로 했어요. 제가 양평으로 이사 온 것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양평 강하면 한 마을도서관 2층에서 ‘전통춤 놀이’(초등생 대상) 특강(2024년 10월).
ⓒ 이송
사회문화적 가치는 없고 '떡고물'만

'춤은 생명'이라 한 이는 이사도라 던컨. 120여년 전 독일 베를린에 춤 학교를 설립하며 한 말이다. 전통춤으로는 감성을 다 드러낼 수 없다며 토슈즈와 튀튀를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옷차림과 맨발로 춤을 췄다. 짜르(황제)에게 빵을 요구하다 살해된 노동자 장례식(1차 러시아혁명 시작)을 보고 마음을 굳힌 것. 로댕 등 파리 문예인들은 그의 춤에 '프랑스 대혁명'이 보인다고 했다. '자유 춤'(현대무용)의 시작이었다. 이송 문화기획가의 '탈출'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그의 '소금'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역축제 현장을 다녀봐도, 지역문화 관련 사업(공모 등)에 참여하면서도 늘 아쉬운 건 그 '소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떡고물' 관심뿐이었다. 여기저기 '생활문화예술가'가 넘쳐나는데, 하나 같이 '이거 하면 얼마나(어떤 지원) 주나요?' 물음뿐.

"문화(예술)기획가로 변신했죠. 예술에 가치를 입히고 문화화하는 일엔 춤꾼보다 수월할 거라 생각했어요. 무대에 지역춤을 올리고, 극장 대본 만들기와 기존작품 갱신(업그레이드) 등 콘텐츠에 매달렸죠. 그러다 또 하나의 벽에 부딪혔어요. 그걸 봐줄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콘텐츠의 고급화, 관객의 확대를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문화기획 '예감'(2020년부터) 활동과 동국대 대학원 강의(2018년부터)를 해왔다. 경기문화재단 이사, 국립극장진흥재단 이사,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정동극장 전문위원,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연구원, 국립중앙극장 총무, 민족미학연구소 연구위원 등을 역임했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춤 이야기>(2005년), <거장과의 대화>(2004년) 등 3편의 책을 펴냈다. <춘향연가>(2009년 정동극장), <미소2-신국의 땅 신라>(2011~2013년 정동극장) 등의 대본작가로 활동했다. <퇴계연가-매향>(2016년)과 <안녕, 모란을 만나다>(2021년) 연출을 맡기도 했다.

"비상계엄이 발표되던 날이었어요. 네이버 검색창에 제 이름을 쳤다 놀랐죠. 2012년 전국연합모의고사 시험문제 지문(4문제)으로 <알고 보면...> 책이 활용된 거예요. '검무'의 '연풍대'(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리는 춤사위) 문제였어요. 한 도서관 베스트셀러(시험 지문 때문)로 떴고요. 남편에게 소리 질렀다, 계엄정국에 웬 호들갑이냐는 소리만 들었지만요."

양평엔 2014년 이주했다. 아버지의 단월 땅에 텃밭 가꾸러 오곤 했는데, 마침 대본상(찬기파랑가, 2011년)으로 3000만 원을 받아 남편(문화기획, 실학박물관장)에게 준 게 계기. 밥 한번 제대로 차려준 적이 없어 미안한 맘에 '밥값'이라고 건넨 것. 땅을 소개받아 구매했고, 집 짓고, 가족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왔다.

"1년만 살아보려 했죠. 가족 모두 만족했어요. 큰애(아들, 군복무)는 용문초교(전교생 100명 미만) 플로어볼(하키 일종) 선수를 하며 전국 준우승을 여러 차례 했어요. 그 애가 꽃과 나무를 좋아해 시골로 온 거거든요. 시골아이로 크기를 바랐고요. 둘째(딸, 고교생)는 용문역에서 집까지 1시간 30분여를 걸어올 정도로 흑천 뚝방길이 좋대요."
 양평 용문면 주민자치위 주최 ‘춤 화첩’(전통춤 인문학) 공연. 용문면다목적청사 3층 대강당.(2024년 9월)
ⓒ 이송
작은 일탈 속 창조, 그 구태 벗기

그의 지역사랑은 커갔다. 양평 나루터문화복원(2021년, 공동연구), '양평푸드, 맛의 달인을 찾아서'(2023년, 총괄기획) 사업 때 12개 읍면 278개 리를 찾아다니며 조사활동을 벌였다. 무엇보다 공들인 건 한국문화예술위 공모 '인생나눔교실'(멘토 교육 2027년). 원주민, 홀몸노인, 홀부모, 갱년기여성, 며느리(3대동거) 등 49명 멘티에게 10명 멘토를 붙여 121개 멘토링 활동을 했다.

"홀몸노인 멘토교육을 15회 했는데, 해외 가족여행 때문에 1명이 두차례 빠진 거 빼고 불참자가 없었어요. 한번은 프로그램을 쉬고 밥 먹으러 가자니 '이런 시간 언제 또 오겠냐'며 밥은 나중에 먹자 하더라고요. 아이들 모임에서는 서울구경, 국립극장 공연과 대학로 뮤지컬(김민기) 관람 등을 했는데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루바토(rubato)라는 말이 있다. 음악 빠르기(템포) 중 하나인데, 조금 늘이거나 당겨 리듬에 변화를 주는 기법. 훔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움직임이라 했다. 인간 욕망으로 견주면 아주 작은 일탈, 거기서 시작된 작은 창조 쯤. 틀을 벗으려고 전통춤을 뛰어넘은 문화기획가의 발버둥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저널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