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불신하는 면피의 세계”… 형식 얽매인 공직사회 직격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지음
사이드웨이, 284면, 1만8000원
공직사회를 향한 이토록 신랄한 비판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사회를 직접 경험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먹던 우물에 침 뱉지 말라”는 충고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대학 졸업 전 행정고시에 합격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사무관으로 10년을 근무했다. 중간에 병역의 의무를 마쳤다. 서기관으로 승진하자마자 사표를 던졌다.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공직사회의 다양한 헛짓거리를 경험하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습득한 무기력 때문”이었다.
저자는 무기력의 근원을 천천히 풀어나간다. 스스로 ‘실패담’이라고 부른다. 한강 작가도 포함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벌어지던 때 다행히 저자는 공군 장교로 군 복무 중이었다. 입대 전 문체부에서 출판의 해외 진출·국제 교류 사업을 맡고 있었다. 자칫 엮였을 수도 있었지만 행운이 따랐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는 “공직 사회에서 위법한 지시는 늘 있을 텐데 그때마다 운이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블랙리스트 사건 때만 해도 실무 공무원은 처벌받지 않았다. ‘월성원전 자료 삭제 사건’ 등에서 보듯 최근 들어서는 국장급 이하 공무원부터 구속됐다. 윗선의 지시를 이행한 실무자도 법적 책임을 묻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공무원들은 책임질 만한 일은 맡지 않고 맡더라도 책임 소재를 분명히 남기려고 한다. 국·과장이 보고서를 수정하면 실무자는 ‘과수원(과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 등을 파일명에 추가하고, 회의 과정을 녹음하기도 한다. 업무 수첩에 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적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저자는 “공직 사회는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서로를 불신한다”면서 “공직사회는 끊임없는 면피의 세계”라고 말한다.
보고서 작성은 공무원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중요한 일이다. 작성의 원칙은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1장에 ‘핵심만 간단하게’ 넣어야 한다는 것. 국장에게는 컬러로 프린트해야 한다. 하나의 단어가 줄을 바꿔 걸쳐 있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도 있다. 때문에 공무원에게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에서 가장 익숙한 단축키는 자간을 조정하는 ‘alt+shift+n/w’라고 한다. 형식에 집착하면서 보고서 작성의 목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깔끔한 문서 작성에 방점을 둔다. 실무 담당자조차도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성이 생긴다. 저자는 “공무원은 보고하기 좋은 보고서를 만들 시간에 복잡다단한 변화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노력을 들여야 한다”면서 “공직사회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곳이지 보고서 예쁘게 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곳이 아니다”고 비판한다.
공무원들은 퇴근 후나, 주말에도 항상 긴급 호출에 대비할 수 있는 ‘온콜(on-call)’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국회가 열릴 때는 새벽까지 자료와 질의에 대응하고, 예산 시즌에는 기획재정부의 연락에 언제든 답해야 한다. 저자는 대다수 중앙부처의 일이 밤낮없이 돌아가는 것은 철저하게 비효율적인 보여주기식 관행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비상경제장관회의 등을 일요일에 하는 이유는 각료들이 주말 없이 일하는 모습을 월요일자 신문에 보여주기 위해서고, 국감 때 장관의 답변을 미리 준비하는 관행은 그저 장관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국민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다. 온콜에 시달리는 공무원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시키는 일에도 벅찬데 새로 무슨 일을 벌일 시간과 의지도 없어진다.
책에는 규정 하나를 바꾸는 데 불필요한 연구 용역과 위원회를 거쳐 2년이나 결정을 미루는 무책임 행정, 행정력 낭비로 이어지는 국회의 무분별한 자료 요구, 정책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정부의 홍보 과잉, 비난 여론을 잠시나마 무마시키기 위한 면피성 대책 등 생생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외 없이 ‘영리해서 무능한 관료’들이다. 복잡하고 모순된 구조 안에서 관료는 생존과 나름의 성공을 위해 체제에 맞춰 영리한 방식을 찾아가지만, 이는 곧 공직사회의 전반적인 무능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공직사회를 포장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이상(理想)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된 의미의 공익은 흐려진 채 무수한 비효율적인 관습이 일상화된 ‘이상(異常)한 세계’가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관료는 그 이상한 세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며 무능을 공고히 하는 주범(主犯)에 가깝다.
그저 비판만 있다면 책의 의미는 반감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행정의 힘과 가치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정부의 유능함은 기업의 성공이나 정치의 선진화만큼이나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변수”라면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은 2년마다 보직을 바꾸는 현재 인사제도를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문성은 정책의 품질 제고에 그치지 않고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가장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권한은 약한데 결과에 대한 책임만 져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히 업무에는 무기력해진다”면서 공무원의 권한과 의무의 불일치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내내 지적한 쓸데없고 무의미한 ‘가짜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공직 사회의 무능과 무기력은 공무원이 일을 안 해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생긴다”면서 “불필요한 일을 걷어내고 공무원이 본래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 세·줄·평★ ★ ★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들이 꼭 읽어봤으면 한다
·기자로서 공무원에게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준 적은 없는지 반성한다
·글도 좋고 깊은 고민을 느낄 수 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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