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특'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는 교사, 이유가 기가 막혔다
[서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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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에 교사들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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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올해 여름방학은 채 2주가 안 됐다. 대신 겨울방학은 1월부터 2월까지 온전히 두 달이다. 그 사이 졸업식과 종업식이 있는 이틀 정도 등교하면 된다.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라면, 말 그대로 '배움(學)을 놓는(放)' 방학이다.
부디 오해 없길 바란다. 아이들이 그렇단 이야기지, 교사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아직도 주위에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교사들을 향해 방학이 있지 않느냐며 시샘 섞인 질타를 쏟아낸다. 외국처럼 방학 기간에는 급여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날 선 주장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교사들은 방학이 되어야 비로소 '행정 업무'를 시작한다. 마치 은행원들이 은행의 영업시간이 종료되어 출입문이 닫힌 뒤라야 주어진 업무를 시작하는 일상과 유사하다. 특히 인문계고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방학 중 업무는 아이들의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를 작성하는 일이다.
지난 1년 동안 활동했던 내용을 앨범 정리하듯 그러모은다. 수행평가 때 발표했던 내용과 수업 시간에 건넨 질문, 친구들과 토론했던 찬반 논리, 책을 읽고 나눈 소감 등이 모두 생기부의 소재가 된다. 특히 교과 세부능력 특기 사항(교과 세특)은 생기부의 '알짬'이다.
'500자'의 벽 앞에 막막해지는 교사들
교과 세특에 기재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달랑(또는 무려)' 500자다. A4 용지로 치면, 기껏해야 10줄 안팎이다. 그 안에 교과별로 아이들의 세부능력을 담아내야 한다. 성취 기준에 부합한 각자의 교과 역량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없는 역량도 어떻게든 짜내야 한다.
'달랑'과 '무려'를 괄호로 묶어 함께 사용한 이유가 있다. 어떤 아이에게 500자는 턱없이 모자라고, 다른 어떤 아이에겐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써야 할 내용이 넘쳐나는 경우, 접속사를 아예 없애고 띄어쓰기를 최소화해서라도 글자 수를 줄이려다 보니 문맥이 어색해지곤 한다.
반면, 도무지 쓸 거리가 없는 경우엔 직접 불러 앞에 앉혀놓고 질문을 던져 대답하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기도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교과 세특을 채울 수 없다. 규정상 생기부의 기재 항목을 빈칸으로 두어선 안 된다.
한쪽에선 써야 할 내용을 줄이느라 썼다 지웠다는 반복하고, 다른 한쪽에선 도무지 쓸 게 없어 10분이고 20분이고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글자 수 제한과 의무 기재 규정을 동시에 탓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한 시간에 두세 명 분량도 쓰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대충 쓸 수도 없다. 교과 세특은 계량화된 점수로 표기되는 내신 평점과 함께 당락을 결정짓는 대입 전형의 핵심 기준이라서다. 교과 세특으로 내신 평점 1점 정도는 뒤집기가 가능하다는 게 통설이다. 만신창이가 된 생기부에 남은 유일한 변별 도구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과 세특을 기재하는 건 분명 교과 교사의 권한이지만, 교사의 '주관대로' 쓰는 것도 무척 조심스럽다. 어떻게든 아이들의 대학 진학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교과 역량을 따지기 전에 알게 모르게 아이들 각자의 진로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아이들이 직접 기록한 '소스'를 건네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수업과 관련된 각자의 세부 활동을 참고하려는 것이다. 과거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교과 세특을 '주어를 바꿔' 기재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당장 동료 교사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다.
글솜씨가 있든 없든 어떻게든 교사가 직접 쓴다. 쓰고 나서 부러 아이들의 '검수'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혹시 오탈자가 있는지, 사실 관계가 틀린 건 없는지 등을 미리 살펴보라는 뜻이다. 이때 특정 내용을 삽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사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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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과 세특의 첫 문장 또한 시작하기가 여간 만만치 않다. |
ⓒ te3pot on Unsplash |
방학이 시작된 첫날, 학기 중 여느 날처럼 출근해 교무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학급별 명렬표와 사진첩, 상담 기록, 활동 내용을 메모한 자료 등을 쌓아놓고 생기부 입력창을 띄웠다. 모든 글쓰기가 그러하듯 교과 세특의 첫 문장 또한 시작하기가 여간 만만치 않다.
점심께가 됐는데, 쓴 게 고작 7명 분량이다. 해찰하지도 않고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았는데 한 시간에 두 명꼴이다. 그렇다고 완성한 교과 세특 내용이 마음에 드냐면 그것도 아니다. 어떻든 이 속도라면 온종일 쓴다고 해도 하루에 한 반도 끝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바심만 난다.
그 와중에 한 동료 교사로부터 '조롱인 듯, 조롱 아닌, 조롱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거다. 그는 족히 한나절이면 전교생 교과 세특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아이들 각자의 수업 중 활동 내용만 정리되어 있다면 누워서 떡 먹기라고 말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다 해결해 준다는 거다. 유료 버전을 활용하면, 흠결을 찾기 힘든 완벽한 문장을 글자 수까지 맞춰 만들어준다며 한껏 자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적고,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학생의 특징을 질문하니 이내 맞춤형 답변을 내놓았다.
인공지능이 1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교사보다 더 완벽하게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 듯해 자못 충격적이었다. 활동 내용이 구체적이고 질문이 명확할수록 답변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글쓰기를 돕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적성과 특기를 꿰뚫고 있는 '얼굴 없는' 교사였다.
요즘 아이들은 과제 보고서는 물론, 노트 정리조차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그들이 교사에게 제출하는 생기부 '소스'조차 인공지능이 간추려 준 게 태반일 거라고 확언했다. 내 경험과 판단으로 그걸 이해하려고 했으니, 인공지능에 대한 세특을 작성한 꼴이 됐다.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어요. 교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의 특성을 인공지능이 간파해 낸 것일 수도 있어요."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생기부 작성에 인공지능이 개입한다는 건, 거칠게 말해서, 아이들에 대한 평가를 인공지능에 맡긴다는 뜻이다. 편리함을 주는 도구를 넘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양새다. 더욱이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전쟁터라는 대입 전형을 좌우하는 셈이어서 위험하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생기부를 대입 전형 자료로 활용해서는 곤란하다. 일부에선 인공지능이 작성한 생기부를 필터링하는 프로그램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옥상옥'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적어도 대입은 인공지능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대입에 인생이 걸려있다고, 대입은 생기부가 좌우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세상일진대, 인공지능은 아무런 죄가 없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라지만, 단지 교과 세특 쓰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건 교사로서 자존을 포기하는 일만 같다.
잠깐 인공지능이 단박에 써준 교과 세특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갈 뻔했지만,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아이들의 학창 시절을 기록할 생기부의 빗장마저 풀리면, 교사마저 편리함에 길들어져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 교사에겐 금도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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