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투병에도 꽃향기 같았던 삶”
평생 난치성 뇌전증에 시달렸던 아들은 “엄마” 한마디 또렷이 못 해보고 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셀 수 없이 많았던 발작을 묵묵히 견뎌낸 아들에게 그것까지 바랐던 것은 욕심인 줄 알면서도 이소현(49)씨는 여전히 ‘엄마’라는 말이 아프게 느껴진다. 지난달 28일 서울 영등포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3년 전 떠난 학준이가 꿈에서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며 눈물을 훔쳤다.
어린 시절 갑작스러운 경련을 겪은 뒤 투병 생활을 해온 이학준군은 2021년 10월 11일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다가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열흘 뒤, 분당차병원에서 심장, 폐, 간, 좌·우 신장을 기증해 5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학준이는 2004년 5월 8일 어버이날 선물처럼 태어난 아이였다. 딸만 여섯인 딸부잣집에서 자란 이씨는 첫 아이가 아들이라 무척 기뻤다고 한다. 하루에도 십여개씩 쓰는 면 기저귀를 매번 손빨래할 정도로 애지중지 키웠다. 약 1년 뒤 둘째 학서가 태어나면서 두 살배기와 신생아를 동시에 챙기는 게 때로는 버거웠지만, 그래도 행복한 날의 연속이었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학서에게 신생아 예방접종을 맞히러 병원에 다녀온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학준이가 잠들기 전 유난히 울어 꽤 오래 달래줬을 뿐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학준이가 눈동자를 하얗게 뒤집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첫 경기(驚氣)였다.
정신없이 달려간 응급실에서 의사는 “열 없이 하는 경기가 더 위험하니 잘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서운 말에 덜컥 겁을 먹고 뇌파 검사를 기다리는데 학준이가 또 한 번 열 없는 경기를 일으켰다. 이씨는 “심장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이를 붙들고 울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준이는 이후 정기적인 뇌파 검사를 받은 끝에 네 살이 되던 해 난치성 뇌전증 판정을 받았다. 담당의가 “장애를 동반할 수 있고 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고 말하던 날의 충격을 이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뇌전증을 앓는 아이는 걷다가도 발작이 일어날 수 있어 곁에서 늘 지켜봐야 한다. 학준이의 상태가 악화해 휠체어 생활이 시작된 뒤에는 먹고, 입고, 씻는 것 모두 이씨의 손을 거쳐야 했다. 약물 치료와 함께 ‘경기파’의 충돌을 줄이려 뇌량 절제술까지 받았지만, 학준이는 호전되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했던 어느 날엔 사흘 내내 경기가 지속돼 의료진이 기록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 학준이를 위해 이씨는 안 해본 게 없다. 언젠가는 아이들 건강에 소곱창이 좋다는 말을 듣곤 마장동에서 소곱창을 떼어와 손수 손질을 해 먹이기도 했다. 한동안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지방 섭취량을 늘리는 케톤 식이요법을 시도했다. 중량을 꼼꼼히 재며 먹였던 그 시절에 대해 이씨는 “조리하는 저도, 학준이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고 돌이켰다.
그러다 수용의 순간이 왔다. 말로 표현은 못 했지만 분명 괴로워할 학준이를 보며 이씨는 “완치되지 못하더라도 학준이와 함께 행복하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치유의 목표가 ‘병의 치유’에서 ‘마음의 치유’로 옮겨간 것”이라며 “학준이 덕분에 삶을 배웠다”고 말했다.
고된 치료과정을 묵묵히 감내했던 학준이를 가족들은 ‘순종의 아이콘’이라고 불렀다. 이씨는 “너무 힘들어서 아이를 붙잡고 하소연했던 적도 있는 못난 엄마였다”며 “학준이는 그런 엄마를 다 이해해줬다. 언제나 눈으로 엄마를 좇으며 엄마만 바라봤다”고 말했다.
학준이의 등·하교를 도왔던 활동 보조 선생님 윤모(53)씨도 학준이만큼 순한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다. 윤씨는 “들어서 옮길 때 저항하거나 소리를 내며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학준이는 늘 조용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제가 집에 가려고 하면 조용하던 학준이가 ‘어’하면서 짧은소리를 내곤 했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았다”며 “‘말로 표현할 순 없어도 내게 고마워하는구나’ 싶어 제가 외려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씨와 병원에서 처음 만나 가깝게 지내온 조윤서(51)씨는 학준이를 ‘눈이 참 맑았던 아이’라고 기억한다. 학준이 만큼 중증은 아니지만 뇌전증 아들을 둔 조씨는 “지금도 학준이의 맑은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며 “어릴 적 움직일 수 있을 땐 곁에 가면 제게 가만히 몸을 기대며 저를 올려다보곤 했다. 그 순간들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다. 참 따뜻했다”고 말했다.
학준이에게 심정지가 왔던 그날 밤 119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응급처치를 한 건 둘째 학서였다. 크게 당황한 가족들 사이로 “사흘 전 학교에서 심폐소생술(CPR) 교육을 받았다”며 학서가 나섰다고 한다. 덕분에 학준이의 심장은 병원 도착과 동시에 되살아났다. 이씨는 “학준이의 심장이 다시 뛰지 않았다면 장기기증은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뒤 이씨는 이때의 기억을 곱씹었다. 학서가 불과 며칠 전 CPR 방법을 배운 이유는 뭘까, 멈췄던 학준이의 심장은 왜 다시 뛰었을까…. 이씨는 “생각할수록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장기기증 적합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에서 오래 아팠던 학준이의 장기가 또래 아이들만큼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얘기를 듣곤 더욱더 사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학준이가 떠나고 나서 이씨는 첫 두 해를 실망과 단념의 반복 속에서 보냈다. 어눌한 “엄마” 소리가 들려 달려가면 학준이의 텅 빈 방이 나왔다. 이씨는 “학준이는 제가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올해부터는 점차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는 학서는 내년부터 교회에서 고등부 선생님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자신처럼 마음에 상처가 있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윤씨도 여전히 학준이를 그리워한다. 그는 “학준이의 삶은 향기로운 꽃 같았다”며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간 학준이를 오랫동안 기억하려 한다”고 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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