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힘 과시하던 공간 장악하자, 정권이 무너졌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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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4.19 혁명 당시 모습 |
| ⓒ 위키미디어 공용 |
그날 이승만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당황했다. 4시간 사이에 계엄을 세 번이나 발포했을 정도다. 19일 상황에 관해 다음날 <동아일보> 톱기사는 "정부는 이날 하오 1시 국무원 공고 82호로써 서울지구 일원에 경비계엄령을, 하오 4시 반엔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4개 도시에 경비계엄령을, 다시 하오 5시엔 전기(前記) 각 지구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라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국민들은 다시 일어나 새벽까지 뜬눈으로 보냈다. 1980년에 전두환은 최규하 정부를 앞세워 5월 17일 밤 9시 30분에 국무회의를 열고 그날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실시했다. 이에 비해, 4·19 때 이승만 정권은 밤중이 아닌 대낮에 세 건이나 연달아 선포했다. 국민들이 잠들기를 기다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서울의 주요 시위 장소는 청와대와 정부청사가 있는 광화문광장, 국회가 있는 여의도, 법원이 밀집한 서초동, 윤석열 대통령이 있는 용산 등이다. 서울이 지금보다 좁았던 4·19 때는 이곳 시위가 광화문-남대문을 잇는 남북라인, 종로대로를 잇는 동서라인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4월 혁명은 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폭발해 전국 각지로 확산된 거국적 항쟁의 결과물이다. 이로 인한 정치적 에너지는 막판에 서울 시위를 격화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서울의 공간 구조와 시위 장소가 시민혁명의 막판 전개에 변수가 됐다.
일제강점기에 비해 1950년대에는 남북라인에 국가기관이 더 많이 집중됐다. 한때 총독관저가 남산에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 때는 광화문뿐 아니라 남산도 지배기구의 이미지와 연결됐다. 이승만 정권 때는 그런 이미지가 광화문으로 더욱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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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당시의 국회의사당 건물이었던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 서울시청 건너편에 있다. |
| ⓒ 김종성 |
4·19 시위대는 입법·행정·사법부가 다 모인 이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했다. 동시에 종로대로도 점거했다. 그런 상태로 국가기관들을 압박했다. 장덕환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한국의 4월혁명>에 정리된 그날 상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10시 반경 서울대학교 학생 시위대는 몽둥이로 제지하는 경찰대와 충돌 끝에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도착했다. 3천여 남녀 학생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격문 낭독과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도로변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 속에 일부는 경무대 쪽으로 노도처럼 흘러갔고"
"대법원장을 만나러 갔던 학생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뒤, 성난 학생들은 12시 15분경 약 2천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시위대가 합세, 법원 정문과 뒷문 등 4개 문을 통해 법원 구내에 진입했다."
입법·행정·사법 3부가 2킬로미터 범위 안에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시위대는 3부를 동시에 압박할 수 있었고, 이는 국가기관들이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원인이 됐다. 이승만 홀로 겁을 먹었다면 측근들이 진정시켜 주거나 고위 관료들이 다른 지역에서 대응책을 강구하기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전 국가기관이 동시에 압력을 받는 상황이라 그것도 용이치 않았다.
TV는 물론이고 인터넷과 SNS까지 발달한 지금은 시위대의 공간적 집결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하지만 1960년에는 TV마저 드물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중요했다. 서울의 남북라인과 동서라인이 국민들에 의해 장악되고 주요 국가기관들이 동시에 포위된 것이 이날을 역사적인 날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해 8월 6일 자 <경향신문> 1면 중하단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해의 국군 병력은 지금보다 많은 60만이었다.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2면 좌상단은 그해의 경찰 병력이 3만 3035명이었다고 알려준다. 현재의 국군이 50만 미만이고 경찰 인력이 2022년 현재 13만이므로, 지금이나 그때나 국가권력이 비상시에 총동원할 수 있는 공권력의 규모는 별반 다르지 않다.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 따르면, 그해 서울 인구는 244만 5402명이었다. 그래서 시위대의 최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적었다. 교통·통신 사정상, 지방 국민들의 상경 시위에도 제약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므로 상경 시위의 필요성도 높지 않았다.
전국 인구는 물론이고 서울 인구도 오늘날보다 적었기 때문에, 군경의 파워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이 졌다. 국민들이 다칠까 봐 져준 게 아니라, 진 것이었다. 시위대에 발포를 했는데도 정권이 패했다.
어린아이들까지 몰려나올 정도로 시위대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북·동서 라인의 장악으로 인해 국가기관 담당자들이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가기관들이 한데 모여 있는 구조는 대중에게 심리적 위압감을 줄 수도 있지만, 4·19 때는 이것이 정반대 기능을 했다. 국가권력 내부에 공포심이 쉽게 전이되는 구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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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일대 전경 |
| ⓒ 유성호 |
정권의 힘을 과시하거나 남북 냉전을 부각시키는 이벤트들이 열리던 곳을 1960년 4월에는 시민들이 점거했다. 총으로 위협하다가 총을 빼앗기면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남북라인이 국민의 수중에 넘어가자 국가권력은 두려움을 품었다. 계엄령 연속 선포는 그런 두려움과도 무관치 않다.
주요 국가기관들이 한곳에 밀집했다는 점과 더불어 1960년 K-시위에 영향을 준 요인이 또 있다. 남북 및 동서 라인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지역에 학교가 많았다. 그래서 시위대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학생들이 두 라인에 금방 진입할 수 있었다.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주요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도심부에 집중해 있었다는 점은 상호 소통 및 이동 가능성을 용이하게 만들어 시위대의 규모와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단시간에 급속히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고대생과 서울대생은 대개 도심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광활한 도로인 종로를 통과하여 이동하면서 선전과 시위를 전개했고 국회 앞 광장에 집결하여 집회와 농성을 벌였으며, 집결지의 충분한 인원수를 바탕으로 인접한 경무대를 향해 진격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서울대가 종로5가 인근의 대학로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서울대생들이 종로대로에 진입하는 게 용이했다. 1950년대 서울 도심의 중고등학교 위치와 관련해 위 논문은 "당시 서울에는 세칭 '5대 공립, 5대 사립' 남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17개 명문 고교가 모두 종로구와 중구 인근에 모여 있었다"고 설명한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학생들이 번개처럼 집결하기가 쉬웠던 것이다.
4월혁명 이후의 서울 도시구조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 있다. 서울 도심에 있던 3부 중에서 입법부는 한강 이남의 여의도로 가고(1975년), 사법부는 역시 한강 이남인 서초구로 갔다(1995년). 17개 고교 중 14곳은 1976년 이후에 강남과 목동 등지로 이전됐다. 이 역시 한강 이남이다. 서울대 역시 한강 이남 관악산으로 옮겨졌다.
도시의 공간 구조는 도시를 지배하는 세력의 의중을 반영한다. 서울의 경우에는 국가를 지배하는 세력의 의중도 크게 작용한다. 3부가 찢어지고 명문 학교들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것은 서울 확장과 강남 개발에 기인한다. 동시에, 4·19의 충격을 받은 보수세력이 1년 뒤 되살아나 유사 사태 방지에 주력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SNS의 발달은 이런 분산이 시위대의 국가기관 압박을 크게 저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의 서울 도심은 이승만 정권의 메시지를 발현하는 공간이었다. 그랬던 곳이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면서 정권을 위협하는 공간으로 돌변했다. 그날 국가권력 담당자들은 비슷한 공간에 뭉쳐 있다가 거의 동시에 압박을 받았다. 발포도 통하지 않고 계엄령도 통하지 않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명언은 이날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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