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중 사이 오락가락…트럼프와 반도체 논의를" [수출엔진이 식는다]
미국과 중국의 첨단기술 전쟁의 복판엔 반도체가 있다. 이들의 무역 전쟁에 따라 한국 반도체의 수출 실적은 물론, 생태계 전반이 좌우된다. 미국이 HBM 등 AI 반도체와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을 금지하면서도,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덤핑(저가 판매)’은 직접 제재하지 않으면서 한국은 중국 메모리와 직접 경쟁해야 할 처지다. 이에 대해 미국 씽크탱크에서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미국 정부와 사전에 중국의 저가 메모리 공세를 논의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 20일 그레고리 앨런 미국 전략문제연구소(CSIS) 와드와니 AI 센터장은 중앙일보와 화상 인터뷰에서 “한국에 엄청나게 중요한 삼성·SK하이닉스의 메모리 사업을 파괴하려는 중국 업체들이 한국 장비 업체들로부터 첨단 무기(장비)를 공급받도록, 한국은 놔둘 것이냐”라며 “한국은 (미국의) 수출 통제 체제에 가입하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말했다.
앨런 센터장은 그러면서 “내가 한국 정부라면, (제재에 미리 동참하면서) 중국의 저가 메모리를 협상 안건으로 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미국 정부는 미국 기술이 포함된 한국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는데, 한국 정부가 중국산 메모리 덤핑 문제를 이와 연계해 협상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CSIS는 미국의 대표적 외교·안보 싱크탱크로, 앨런 센터장은 첨단기술 분야를 담당한다.
韓 정부, 수출 제재 사전 작업에 사실상 실패
미국 내에서도 어플라이드매터리얼즈(AMAT) 같은 장비 기업들이 “대중 제재 때문에 도리어 중국의 반도체 자립이 빨라진다”라고 제재 강화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지난달 앨런 센터장은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 속도를 늦췄다는 사실을 수치로 입증한 보고서를 냈다. 얼마 후인 지난 2일 미 상무부는 첨단 반도체용 장비와 HBM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이번 미국의 추가 제재로 한국은 경쟁국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미국산 장비·기술을 쓴 타국 제품에도 적용하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에 따라 한국산 HBM과 첨단 장비의 중국 수출길이 막혔는데, 일본과 네덜란드는 제재에서 제외됐다. 미국과 협약을 맺어 자체 대중(對中) 수출 제재를 미리 도입해서다.
특히, 중국 최대 D램 제조사 창신메모리(CXMT)를 비롯해 한국과 경쟁하는 중국 기업들이 제재 대상에서 빠졌다. 중국산 HBM를 개발중인 우한신신(XMC)도 구공정 장비 반입은 가능하다. 블룸버그 등 외신은 “일본 정부가 자국 장비를 계속 수출하기 위해 미국에 요구했다”라고 보도했다. 도쿄일렉트론(TEL)·디스코 등 일본 주요 장비 업체들의 중국 매출 비중은 40~45%에 달한다.
최근 지나 레이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국가 보조금으로 시장을 교란하는 중국 구형 반도체에 관세를 물릴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앨런 센터장은 “관세 검토에서도 구형 메모리는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한국, AI·반도체 누구 편에 설 건가”
그는 한국 정부가 트럼프 정부와 시급하게 논의할 산업 현안으로 ‘AI와 반도체’를 꼽았다. 그는 “미래 군사적, 경제적 힘의 기반인 AI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데, 한국이 어느 편인지 한국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라며 “한국은 이런 문제를 대통령을 뽑는 5년마다 결정하지 않느냐”라고 되물었다. 한국의 기정학(技政學)적 전략이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이다.
앨런 센터장은 또 한국이 중국 공장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대중 제제는 한국 기업들과 경쟁하는 양쯔메모리(YMTC)와 CXMT에 타격을 주므로 한국에 유리하다”라며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운영은 한국 경제 성장률과 일자리에 도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8년 테슬라가 세운 중국 공장의 공급망과 숙련 인력을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다 흡수한 점을 거론했다. 지난주 로이터는 상하이 기가팩토리 공장장이 테슬라를 퇴사하고 중국 재생에너지 그룹의 공급망 관리 책임자로 이직한다고 보도했다.
엔비디아 H20, 여전히 중국 수요 클 것
그는 중국의 첨단 AI 칩 생산 능력이 충분치 않다고 봤다. 그는 중국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경쟁하는 화웨이의 AI 가속기 ‘어센드’(ASCEND) 칩에 대해 “대부분 중국 파운드리 SMIC가 아닌 대만 TSMC에서 제조된 것으로 파악하며, TSMC가 7나노 이하 제조에서 중국 고객을 모두 차단했기에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TSMC는 지난 2020년 화웨이 칩의 위탁제조를 중단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화웨이 제품에서 TSMC 제조 칩이 발견되자, TSMC는 화웨이로 칩이 흘러 들어갈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든 중국 고객사와 첨단 칩 제조 거래를 중단했다. 이제는 TSMC가 어센드를 생산해주지 않고, SMIC는 수율(양품 생산비율)이 낮아 충분한 물량을 생산할 수 없기에, 중국 내 AI 가속기 수요가 엔비디아 H20으로 몰릴 거라는 얘기다. 이번 제재로 구세대 HBM의 중국 수출은 막혔지만, 삼성전자 HBM3이 탑재된 엔비디아 H20의 수출은 여전히 가능하다.
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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