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친일 전수 조사'... 이걸 해낸 정치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12. 2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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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국회 내의 '친일파'부터 청산하자고 외친 김명동

[김종성 기자]

 국회의원 김명동
ⓒ 위키미디어 공용
한국 현대사에서 친일청산이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는 1948년 하반기와 이듬해 상반기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되고 국회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을 속속 체포할 때가 절정기였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는 친일청산의 동력이 가장 약할 때였다. 1948년 5·10 총선과 8·15 정부수립 직후인 이 시기는 미군정이 무장 혹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 부분 약화시킨 이후였다. 가장 강력하게 친일청산을 추진할 세력이 미군정의 탄압으로 꺾인 뒤였다. 그래서 반민특위가 주도하는 친일청산이 상대적으로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청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 된 반민특위는 9개 도와 특별시를 대표하는 10명의 국회의원인 김경배·김명동·김상덕·김상돈·김준연·김효석·박우경·오기열·이종순·조중현으로 구성됐다. 김상덕은 위원장이 되고 김상돈은 부위원장이 됐다. 정식 명칭이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인 이 기구가 구성된 것은 1948년 9월 23일이다. 이듬해 1월 내무부차관이 된 김효석의 자리에는 조규갑이 들어갔다.

특위 위원 10명 중 과반수는 항일운동가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특별조사위원은 김상덕·김명동·김준연·오기열·이종순·김경배 등 모두 6명이었다"라고 말한다. 보고서는 이 중에서 김준연을 변절자로 분류한다.

10명의 특위 위원 중에서 친일청산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1902년 생이자 충남 홍성 출신(충남 공주 출신으로도 표기)인 김명동이었다. "김명동은 정부 내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보고서는 평한다. 보고서는 여타 위원들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한다.

"조규갑·김경배도 반민법 제정에 적극 찬성한 자였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김준연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고 처벌도 관대히 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고, 김상돈은 경감·면제 조항을 적극 찬성했고, 조중현·오기열·김효석·이종순 등은 반민법 결의 과정에서 어떤 입장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내부의 친일파부터 청산'... 김명동의 친일 청산 의지
 1949년 반민특위 공판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전 정권 청산이 최대 이슈가 된 2016년 12월과 2024년 12월의 탄핵소추 정국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입장과 태도가 핵심 변수가 됐다. 국회 외부의 친일청산 동력이 크게 약화된 1948년 하반기의 친일청산 국면에서는 특위 국회의원들의 입장과 태도가 중요성을 띠었다.

그런 시기에 명동(明東)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가장 선명한 노선을 걸은 김명동은 동료 국회의원들마저 크게 긴장시켰다. 위 보고서는 그가 정부 내의 친일파를 조사했다고 알려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가 청소' 논리를 내세워 '우리 내부의 친일파부터 청산하자'고 주장했다.

반민특위에 관한 38번째 특집기사가 실린 1977년 8월 3일 자 <경향신문> 5면은 "국회 내의 반민법 해당자도 조사를 하여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민특위의 소장 열렬파인 김명동이 한 수 앞질러 하고 나섰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을 움직여 국회 자격심사위원회가 국회의원 전수 조사에 착수하도록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약 3주간 의원 200명의 과거 행적을 조사했고, '아무개는 친일파'라는 투서가 들어온 의원들에 대해서는 출신지까지 찾아가 조사했다.

그런데 위원회는 1949년 3월에 황당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회의원 중 반민법 제5조 해당자는 한 명도 없다"라는 보고서였다. 제5조는 "일본 치하에(서)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에 관한 규정이다. 친일행위의 상세 내용은 제5가 아닌 제4조에 있었다. 제4조는 왜 안 보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김명동은 국회 내의 반민법 위반자를 색출하자고 했지만, 위원회는 반민법 제5조 위반자만 찾아봤다. 그런 뒤 '국회 내에는 반민법 위반자가 없다'가 아니라 '국회 내에는 제5조 위반자가 없다'는 결론으로 종결했다. 이 시기 친일청산이 얼마나 부조리한 여건하에서 진행됐는지를 보여준다.

헌병이나 고등경찰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는 일은 지금은 물론이고 그 시절에도 쉽지 않았다. 고위직 관료 출신일지라도 재력이 없으면 총선에 출마하기 힘든 것도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국회의원들에게 별로 해당되지 않을 조문을 골라냈던 것이다.

당시 국회가 제5조만 꼭 집은 것은 김명동의 '자가청소' 논리가 상당수 국회의원들을 부담스럽게 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국회는 반민특위의 무풍지대가 됐다.

김명동의 투쟁 의지 꺾은 이승만 정권
 2019년 6월 5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관련 후손 기자회견에서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왼쪽 네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김명동은 20대 때부터 국내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로 활동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는 그가 없지만,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17세 때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25세 때인 1927년에는 국내 최대의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의 설립에 참여했다.

원호처(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10권: 대중투쟁사>는 신채호·한용운·조만식·이상재·안재홍·홍명희 등이 포함된 신간회 발기인들을 거명하는 대목에서 "1월 19일에 발기인 김명동 등 34인의 명의로 아래와 같은 신간회 강령을 발표하였다"라며 김명동의 이름을 언급한다.

국내 최대 독립운동단체의 34인 발기인 중 하나였다는 점은 20대 중반의 김명동이 얼마나 촉망받는 청년운동가였는지를 알려준다. 그는 이 조직에서 중앙집행위원과 신간회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원 등으로 활약했다. 또 지방 지부의 확장에도 참여했다.

1927년 6월 19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은 그가 나흘 전 홍성청년회관에서 열린 신간회 홍성지회 준비모임에 참석한 사실을 보도했다. "본부 상부 간사 김명동 씨의 신간회 강령 설명이 잇섯고"라고 신문은 전했다. 고향의 신간회 지회 설립을 도우며 일종의 격려 방문을 했던 것이다.

1993년도 단재학술상(신채호 학술상) 수상작인 전 동덕여대 교수 이균영의 <신간회 연구>에 따르면, 일제 고등법원검사국(고등검찰청)이 1931년에 발행한 <조선형사정책자료>는 신간회의 지방 지부가 260개라는 말도 있고 386곳이라는 말도 있다고 알려준다. 신간회가 이 정도로 뻗어나가는 데에 김명동도 한몫을 했다.

43세 나이로 광복을 맞이한 김명동은 3년 뒤 5·10총선 당시 충남 공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 뒤 반민특위에 참여해 가장 선명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이는 1949년 6월 6일 대통령이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특위 처단에 나섰을 때 그가 현장에서 위협을 받는 원인이 됐다.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을 속속 잡아들이며 일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자 이승만은 거듭거듭 제동을 걸었다. 처음에는 담화 등의 형식으로 훼방하던 그는 6월 6일에는 체포조까지 파견해 무력 공격을 벌였다.

반민특위에 관한 61번째 특집이 실린 1977년 9월 5일 자 <경향신문> 5면은 윤기병 서울 중부경찰서장이 6월 6일 오전 7시에 병력 80명을 경찰서 뒷마당에 모아 놓고 "우리가 하려는 행동은 불법적인 비상조치인 만큼 사정이 있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 뒤 체포조 40명을 추리는 장면을 묘사한다. 윤 서장도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기사는 설명한다.

이날 체포조는 한편으로는 반민특위 직원들과 특경대원(특위 경찰)들을 체포하고, 한편으로는 특위 정문을 봉쇄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 권승렬은 '상부 지시'를 운운하는 체포조에 가로막혀 정문에서 몸수색을 당하고 무기를 빼앗겼다.

이 모습을 본 김명동은 "상부 지시라니, 상부가 누구냐?"며 고함을 쳤다. "김명동·김상돈 등이 곳곳에서 고함을 지르자 윤기병은 '좋을 대로 해석하라'며 버텼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김상돈이 '즉각 국회를 열겠다'며 호통을 치자, 윤기병은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면서 1949년 하반기에 친일청산의 동력이 떨어졌다.

이 사건 뒤 김명동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가 국회의 석방요구결의로 풀려났다. 반민특위를 주도한 다른 의원들은 빨갱이로 몰려 유명한 '국회 프락치 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정부는 물론이고 국회 내의 친일파부터 찾아내자며 친일청산을 선도한 김명동의 투쟁은 그렇게 꺾였다. 그 뒤 그는 2년 만에 치러진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 직후 한국전쟁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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