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공제, 상호 돌봄의 안전망을 만들자

문진수 2024. 12. 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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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선하게 쓰이는 세상을 꿈꾸며 ④

사회와 경제를 움직이는 혈관인 금융의 사회성을 회복하고 대안적인 금융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단체 ‘사회적금융연구원’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한국 사회적금융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포럼을 개최했다. 이글은 이번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사회적금융(social finance)의 현주소와 전망을 소개할 예정이다. <기자말>

[문진수 기자]

영국 자선재단(CAF)이 매년 발표하는 국제나눔지수(World Giving Index)라는 통계가 있다. ①낯선 사람을 도운 적 있는가 ②기부나 후원한 적이 있는가 ③나눔이나 봉사를 한 적 있는가, 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렇다'라고 답변한 이들의 숫자를 집계해 산출한 결과다.

2023년 기준, 1위(74%)는 인도네시아다. 평균(40%)보다 무려 34% 포인트(point)가 높다. 벌써 7년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선은 66%, 기부는 90%, 봉사는 65%다. 300개가 넘는 인종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에 이처럼 높은 박애 정신이 흐르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다.
▲ 국제나눔지수 평균값 (2014∼2023) World Giving Index 2024
ⓒ Charities Aid Foundation
한국은 몇 위일까. 조사 대상 국가(142개) 중 88위(38%)를 기록했다. 수년째 중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자선은 53%, 기부는 40%, 봉사는 20%가 '예'라고 답변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 중 약 절반(47%)은 남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고, 60%는 기부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며, 80%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도네시아에는 '함께 어깨에 짊어진다'는 뜻의 고똥로용(gotong royong) 문화가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의 계(契)와 유사한 아리산(arisan)이라는 모임도 활성화되어 있다. 본인이 곗돈을 타는 순번이어도 계원 중 누군가가 아파서 병원비가 필요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순서를 양보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돕는 것을 상호부조(mutual aid)라고 한다. 상호부조를 위해 만든 제도가 공제(共濟)다. 공제는 '함께 배를 타고 건넌다'는 뜻이다. 고똥로용, 아리산, 계, 두레, 품앗이, 상호부조, 공제의 뿌리는 같다.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정신이다.

유럽에서 공제의 역사는 무척 길다. 산업혁명 초기에 만들어져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모태 역할을 했다. 유럽연합(EU)에 속한 나라의 보험회사 중 약 7할이 공제조합(mutual)이다. 일본의 협동조합 공제에 가입한 조합원 수는 7800만 명이 넘는다. 계약 건수는 1억 건을 상회하고, 공제금 총액은 800조 엔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공제는 보험과 동의어로 읽힌다. 영리 보험회사가 판매하는 '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특정 산업별로 종사자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공제회가 여럿 존재하지만,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상부상조나 호혜에 입각한 금융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자활공동체, 사회적기업, 노동조합, 협동조합, 활동가 등 여러 부문/단위에서 시민 공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같은 목적을 위해 모인 공동체 회원들끼리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살려 '안전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보험회사의 상품을 사면 될 것인데, 힘들게 공제사업을 하려는 이유가 뭘까.

보험은 우발적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합리적 수단이며 시스템일 뿐, 국가나 민간 보험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영 보험회사는 수익 추구가 목적이다. 피보험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보험사의 계리(計理)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협동 공제는 생활상 위험과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설립 목적과 사업 내용, 운영 원리가 보험회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같은 돈을 넣었을 때, 돌아오는 혜택이 훨씬 크다.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도 공제는 돈은 제일 적게 쓰면서 높은 효율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다. 자신들이 스스로 갹출한 돈으로 각종 위험을 해결하는 방식이므로 재정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법/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주고 사업이 잘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면 된다.

호혜(互惠)에 바탕을 둔 금융질서는 무너진 사회적 관계를 복구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종과 언어가 다른 이들이 섞여 살아가지만, 세계에서 가장 포용적인 나라를 만든 인도네시아가 보여주고 있는 교훈이다.

우리 역사에서 호혜 금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계(契)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다. 민중들은 돈과 금융이 공동체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상호 돌봄의 안전망을 만들어 예기치 않는 위험에 대비했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아름다운 자치 조직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정신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추운 겨울, 여의도 탄핵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을 위해 일용할 '빵'과 따뜻한 '차'를 미리 결제하는 풀뿌리 시민들을 보라. 우리들 각자는 차가운 도시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지만, 국가적 환란이 닥치면 장롱을 뒤져 금붙이를 내놓고, 지갑을 열고, 나눔을 실천한다.
▲ 여의도 시민 선결제 상점 지도 torchmap.kr
ⓒ 시위도밥먹고
오랜 시간 시민 공제를 탐구해 온 전 상지대 김형미 교수는 "자조, 호혜 금융은 망가진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토대이며, 이를 장려할 수 있는 정책 환경이 절실하다"라고 말한다. 시민 간 연대에 기초한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국회와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금융연구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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