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적기" 권성동의 속셈은? 지금은 '윤석열 축출'의 적기
[김종성 기자]
▲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의원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
ⓒ 남소연 |
개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개헌 논의가 초점을 분산시키고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하루빨리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할 상황에서 집중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
현행 헌법은 전문, 제1장 총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 제5장 법원, 제6장 헌법재판소, 제7장 선거관리, 제8장 지방자치, 제9장 경제, 제10장 헌법개정, 부칙으로 구성돼 있다.
정치권이 주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제3장과 제4장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론은 그것이 내각제 개헌론이든 임기단축 대통령제 개헌론이든 주로 그 부분에 집중돼 있다. 개헌 논의가 제2장이나 제9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고, 제3장과 제4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면 이 와중에 개헌을 둘러싸고 정치적 흥정이 벌어지는 모양새가 연출될 수 있다.
12.3 직후에 국민의힘 내에서 임기단축 개헌론이 힘을 받았다. 비상계엄 이전에는 민주당 주류와 조국혁신당 등에서 그 논의가 나왔다. 이 방안은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는 윤석열을 명예롭게 퇴진시키는 방법으로 평가됐다. 비상계엄 이전에 야권이 이를 고려한 것은 그때는 윤석열이 아직 강했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윤석열이 추락했을 뿐 아니라 국민을 이처럼 위협하고 분노케 하는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개헌론의 함의
권성동 원내대표의 국회의장 방문은 그 같은 임기단축 개헌론을 제기했을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박태서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은 임기단축 개헌은 논의되지 않았다고 13일 밝혔다. 그러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그런 개헌론의 함의에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민들이 헌법전을 볼 때마다 윤석열을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임기단축 조항을 헌법 부칙 같은 데에 규정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박정희 사망 뒤인 1979년 12월 21일 취임식을 가진 최규하 대통령의 임기는 유신헌법인 '1972년 헌법' 제45조 제2항(대통령이 궐위된 경우의 후임자는 전임자의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에 따라 박정희의 6년 임기 만료 시점인 1984년 12월 26일까지로 인정됐다.
그러나 최규하는 전두환의 압력으로 1980년 8월 16일 사퇴했고, 뒤이어 9월 1일 전두환이 취임했다. 동일한 헌법이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전두환의 임기 역시 1984년 12월까지였다.
이 상태에서 전두환 정권은 임기단축이 포함된 개헌을 했다. 1980년 10월 27일 개헌 때 "이 헌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의 임기는 이 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이 선출됨과 동시에 종료된다"는 조문을 부칙 제3조에 넣었다. 이에 의거해 전두환은 새로운 헌법하에서 1981년 2월 25일부터 7년 임기를 새로 시작했다. 1980년의 임기단축은 전두환의 집권 연장을 위한 수단이 됐다.
그것은 당시 헌법 부칙에 전두환의 흔적을 남겼다. "이 헌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은 전두환을 지칭하는 문구였다. 그래서 헌법 부칙을 볼 때마다 전두환을 떠올리게 될 수 있었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임기단축 개헌 역시 새로운 헌법에 비슷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이 헌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 같은 헌법 문구를 볼 때마다 윤석열의 얼굴과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경의 충격이 떠오를 수 있다.
임기단축 개헌이든 아니든, 개헌론을 띄워 여론을 분산시키는 방식은 온 국민이 저항에 나선 지금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자유당 정권이 이미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당한 효과를 낳은 방식이다. 자유당 입장에서 볼 때 상당한 효과였다.
▲ 4.19 혁명을 보도한 1960년 4월 26일 자 <동아일보>. '횃불 올린 교수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교수 시위대가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선거를 다시 하라"는 구호와 함께 거리 행진을 했다고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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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3일 자 <조선일보> 1면 우하단은 "3·15 선거 뒤부터 당과 국무원의 쇄신을 부르짖고 나선 자유당의 혁신파 의원들은 23일 상오의 회의에서 그들의 당면한 목표를 (1)부통령 없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것과 (2)마산사건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학생 데모의 동기가 된 관련 사고의 주요 책임자에 대한 책임 추궁 등이라고 정하였"다고 보도했다.
시위 도중 실종됐던 학생 김주열이 4월 11일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제2차 마산항쟁을 비롯한 국민적 저항이 한층 거세졌다. 자유당 개헌론자들은 이와 관련된 문제를 (2)에 두고 내각제 개헌을 당면과제의 (1)에 뒀다. 그러면서 정치권에 개헌이라는 미끼를 던졌다. 이것을 민주당 구파(한민당·민주국민당 출신)가 덥석 물었다. 위 기사는 자유당 의원들이 민주당 구파와의 논의를 이미 진전시켰기 때문에 조만간 개헌안 골자를 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만도 4월 23일 비슷한 시각에 개헌론을 제기했다. 그날 <조선일보> 1면 우중간은 "이 대통령은 23일 상오 '8·15 이전을 목표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할 것'을 명백히 하였다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이승만이 가장 싫어한 정치시스템이 내각책임제였다. 그달 27일 자 <대한뉴스>에 따르면, 23일 오후에 이승만은 서울대병원을 방문해 4·19 부상 학생들을 위로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날 그는 마음에 없는 일을 많이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내놓은 개헌론은 4·19 저항의 대오를 흩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수립 당시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 정치인들이 희망했던 것이 내각제 개헌이었다. 이 미끼는 4월혁명 정국이 개헌 정국으로 신속히 전환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대학 교수단 시위(4.25)로 저항의 열기가 한층 뜨거워져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4.26)한 뒤에 민주당을 포함한 정치권은 내각제 개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는 4·19혁명이 국민의 관점이 아닌 정치권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청산의 대상인 자유당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헌 흥정에 참여하는 부조리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결국 3·15부정선거 처벌은 그해 6월 15일의 개헌에 반영되지 못했다. (1)만 들어가고 (2)는 들어가지 않았다.
정치권이 개헌 논의에 빠진 틈을 타서 이승만의 제자인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은 이승만 부부를 하와이로 도피시켰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단죄와 그의 폭정에 대한 청산이 제약을 받았다. 이는 4·19를 주도한 이른바 혁신세력의 동력을 떨어트렸다. 박정희가 이듬해 5월에 용이하게 쿠데타를 일으키는 환경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이 총궐기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윤석열 축출이지 개헌이 아니다. 탄핵과 자진 하야를 포함해 그에 대한 응징이 우선적으로 처리돼야 할 때다. 개헌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개헌의 적기가 아니라 윤석열 축출의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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