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다
[이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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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일본군과 청나라(중국)군이 조선에서 전투하는 전쟁화보 풍속화(만화)다.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자료는 원본으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 동학혁명기념관 |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였다. 이른바 풍도해전이라 일컫는 아산만 앞바다에 주둔중인 청나라 북양함대를 일본군 연합함대가 기습 공격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은 청군을 향해 선전포고와 함께 청일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평양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고, 황해해전과 대동강·압록강 해전에서 청군을 궤멸시켰다. 청군의 계속된 패전으로 조선에서 본국으로 후퇴하였으며, 일본군은 중국으로 진격하면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일본은 청나라를 제압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일본군, 풍도해전을 일으키다
조선 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청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의 철병을 요구하라고 협박하여 기어코 이를 관철시켰다. 일본군은 명분을 확보한 후,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6월 23일(양7.25) 이토 스케유키가 이끄는 연합함대로 하여금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 주둔 중인 청의 북양 함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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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청일전쟁화보 평양전투 풍속만화이다. 본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 동학혁명기념관 |
청의 이홍장은 6월 29일 청나라 주재 각국 공사를 초빙하여 '청과 일본은 아직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는데, 일본이 청의 함대와 군사들을 기습 공격하여 국제법을 위반하였다.'는 성명을 내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한다고 공표하였다. 또 조선에 대해서는 속방의 보호를 내세워 국가를 인정하지만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군을 축출한다고 공개 선언하였다. 이에 일본은 7월 1일(양8.1) 청에 정식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7월 26일 조일공수동맹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는 청과 전쟁을 하는 일본에 대해 조선이 중부 이북을 병참기지로 제공해야 하고, 식량 조달 및 노동력과 물자까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파병하는 군대와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부산과 한양 사이 21개 요충 지역에 병참부를 불법적으로 설치하였으며, 한양-부산 간 군용전선 가설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여 후일 영남의 동학군들이 호남의 혁명군보다 먼저 기포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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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성 청일전쟁 평양성 전투는 8월 16일과 17일(양9.15-9.16) 양일에 걸쳐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청군 2만여 명과 일본군 1만 2천여 명은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청군은 일본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여 자만하였고, 동시에 본국의 내부 분열 등 악재가 겹쳐 대패하고 말았다. 본 사진은 평양성 옛 사진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 동학혁명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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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청기담 종군견문록 청일전쟁(중국 청나라와 일본과의 전쟁) 종군기자 보고서이다. 정청기담 종군견문록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 동학혁명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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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전투도 1894년 (명치 27년) 9월 15일 제작된 평양전투지도이다. 평양전투도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 동학혁명기념관 |
일본이 청에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과 일본 국민들은 대륙 진출에 승리했다고 열광하였지만, 주변 강국이 견제하고 나서면서 요동반도 할양은 벽에 부딪혔다. 즉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반대와 미국의 거중조정으로 4월 16일(양4.30) 일본이 청의 요동반도를 포기하고 전쟁 배상금만 받는다는 조건의 각서에 서명함으로써 청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청일전쟁에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어 왔던 중국이 섬나라 일본에게 힘없이 무너지고, 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조선과 중국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와 동학농민군 섬멸 작전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또한 이 기세를 몰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은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태평양전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그들의 계략대로 조선을 대륙 침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우리 땅에 불법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기반을 조선의 식민지화를 통해 이뤄낸다. 이로써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패배는 곧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국난을 당하여 조선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도 없었고 항전할 의지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보국안민과 척왜창의를 내세우며 일본군과 한판 붙을 준비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조선 정부의 때늦은 자주개혁 방안은 휴지 조각이 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을 통한 국정 최고 권한의 군국기무처가 설치된다. 그리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갑오개혁(갑오경장) 12개 조가 기무처를 통해 발표된다. 이는 동학군의 폐정개혁안을 상당부분 받아들였으나, 이는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고 무단통치를 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의 자주 개혁 노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6월 22일부터 섭정을 하면서 민비의 측근들을 내쫓았다. 또한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오도리의 권고에 따라 6월 25일 최고의 국정 처결 권한을 갖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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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례가는길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식민지화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남원에서 기포하고, 삼례에서 척왜창의 즉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의병을 일으킨다. |
ⓒ 박홍규 |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으로 불리는 기무처(機務處) 의안은 6월 28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1. 국내외의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고, 조선 개국기년을 쓸 것.
2. 청국과는 조약을 바꿔 바르게 하고, 전권공사를 각국에 파견할 것.
3. 가문의 신분과 양반 상민의 등급을 없애고, 귀하고 천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쓸 것.
4. 문무(文武)는 높고 낮음의 구별을 폐지하고, 벼슬의 직품에 의해서만 서로 의식을 거행할 것.
5. 죄인 외의 친족에게 연대책임과 처벌을 일체 폐할 것.
6. 본처와 첩실 모두에게 아들이 없는 뒤에야 양자를 허용할 것.
7. 어린 나이의 결혼은 엄금하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 혼인을 허락할 것.
8. 홀로 된 여자의 재혼은 귀하고 천함을 가릴 것 없이 허락할 것.
9. 공적 사적 노비의 법은 일체 없애고 사람을 사고파는 것을 금할 것.
10.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위한 의견이 있는 자는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부칠 것.
11. 각 관청의 부서는 필요한 수만큼 더하거나 줄여서 설치할 것.
12. 의복에 관한 제도는 편리하게 고칠 것.
갑오개혁의 내용에 동학혁명군의 폐정개혁안을 참고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후 조선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술책이었다. 조선의 근대 개혁의 효시로까지 평가받는 기무처의 개혁안은 일본의 간섭에 의한 정략적 내용으로, 선언적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내용이 후퇴하고, 조선의 운명은 일본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의 대륙 진출과 곡물수송로 개척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많은 경제적 이권을 강탈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조선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양과 부산 간 일본군용 전신을 가설하고 철도 및 전신 시설 설치를 무력으로 강행했다. 이러한 일본의 이권 강탈 과정에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이 체결되었다.
이는 경부선과 경인선의 철도부설권을 빼앗아 호남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일본 국내로 운반하기 위한 조처였다. 일본은 목포를 중심으로 항구들을 개항할 것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청일전쟁 등 대륙 진출을 위해 정치는 물론 경제 침탈의 야욕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었다.
근대적 헌법 홍범(洪範_모범이 되는 큰 규범)14조 반포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시점인 1895년 1월 7일에 고종을 협박하여 홍범14조를 발표하게 했다. 홍범14조는 박영효 등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에 기반을 두고 정치·경제·사회 등의 개혁을 단행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고 왕권을 분산시키며 민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일본의 정략적 간섭에 의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 할 수 있다. 갑오개혁12개조와 근대헌법 홍범14조는 동학혁명군이 발표하고 실천했던 12개조 폐정개혁안과 27개조 폐정개혁안을 참고하였고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일제의 조선강점을 위한 술책에서 비롯되었다는 부정적인 사실에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홍범14조(洪範十四條)
제1조: 청국(중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제2조: 왕실 전범(왕실예절)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제3조: 국왕(대원군)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지 않는다.
제4조: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제5조: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제6조: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제7조: 조세 부과와 징수 및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제8조: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제9조: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1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0조: 지방관 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의 직권을 한정한다.
제11조: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제12조: 장교(將校)를 교육하고 징병 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제13조: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제14조: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일본의 강점기를 벗어난 해방 이후 현재까지 조선 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도 대한국민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협조하는 밀정들이 수두룩하다. 최근 이종찬 광복회장의 말씀에 의하면, 밀정 즉 소위 친일 뉴라이트 출신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반민족행위에 해당되며, 조선말 일본에 의한 강점기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우려를 씻을 수 없다. 최근 황석영 작가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일제라는 도둑이 조선에 들어와 강도짓을 하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할 때 도둑질에 사용했던 사다리를 두고 간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라는 비유 적절한 말씀을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명언이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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