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이 더럽힌 것들
[이황석 기자]
▲ 12월 3일 저녁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 비상계엄을 기습 발령한 가운데, 국회를 지키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계엄군 차량을 에워싸고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
ⓒ 권우성 |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연구실에 앉아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반문해 보았다. 어쨌든 글은 쓸 것 같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문장 속에서 헤매지는 않았을까싶다. 실연에 빠진 이처럼, 민주주의를 연모하며 상실을 안주삼아 먹지도 못하는 술이라도 마셨을까. 아니면 수감자의 심정으로, 가지 않는 시간을 벽에 아로새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진심 두려웠다. 그동안 누렸던 자유를 아이들에게 허락하지 못하는 아비의 마음은 그렇게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핑하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믿지 말라. 나이 든 이들의 눈물은 십중팔구 자기연민에서 기인한다.
여하튼 평소 SNS를 하지 않아 남들보다 조금 늦게 소식을 접했다. 과제 체크를 위해 컴퓨터를 켜고 학교 온라인 시스템에 접속했을 때야 비로소 뉴스를 접했다. 쪽지 과제 답안대신 학생들이 보낸 '너무 무섭다'는 글들을 마주하게 됐다. 헛웃음이 나왔다. 가족과 통화를 하고 십분 정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번 학기 담당하는 과목 수강생에게 국회가 의결을 통해 계엄 해제라는 절차를 밟을 것이니 정상화될 때까지 모두 차분히 기다려보자는 단체 쪽지를 전송하는 일뿐이었다. 사실 그 시간까지는 군인들이 국회를 점거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뉴스를 접하기 전이었다. 그러다가 실시간 송출되는 매체를 통해, 헬기가 국회의사당 앞 잔디밭에 착륙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라이브로 전송된 계엄군들의 모습은 기성세대인 내게 트라우마로 각인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빠르게 국회로 달려가 의원들을 도왔던 시민들의 힘 때문이었으리라. 그래도 분명한 것은 총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몸으로 거칠게 항의하던 야당의 여성 대변인을 해할 의사는 전혀 없어 보였다. 진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두 믿음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30대 청년으로 보이는 여인도, 얼굴을 가렸지만, 숨길 수 없는 젊은 특임대원도, 그들 각각은 '그는 나를 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임무를 수행해야할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간인이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라는 당위로서 신뢰를 태도로 보여줬다. 말하자면 두 남녀 청년에겐 그동안 우리 사회가 관통한 비극적 역사가 레이어로 각인되어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가설처럼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청년들에겐 다시는 야만적 폭력의 시대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문화적 코드가 밈(meme)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지난 주말 탄핵이 부결되었다. 열패감을 떨치지 못하고 새로운 주를 맞이했지만, 그래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청년들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탄핵 표결 당시 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투박하게 타도를 외치는 나와는 차이가 있었다.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응원봉을 들고, 지치지 않고 온밤을 새웠다. 그들은 진화했다. 부결 소식에도불구하고 아직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고 노래하며, 국회 앞 광장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통제하지 못하는 내 감정이 부끄러웠다. 싸움을 잘하는 이는 흥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들 청춘은 진정 싸울 줄 알았다.
기왕에 문화 평론을 하다 보니, 영화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이번 내란 사태의 원점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영화가 떠올랐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구체적이다. 1978년이다. 주인공인 현수, 우식, 은주 외에도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선도부장 차종훈(이종혁 분)이 그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폭력을 행사하는 교련 선생에게 덤벼드는 유급생 찍새도 그에겐 꼼작하지 못한다. 그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행사하는 존재다.
70년대 중후반, 각급학교는 그야말로 준전시체제였다. 4⋅19 의거로 사라진 학도호국단이 다시 발족한 해가 1975년, 유신독재 체재하였다. 당시 학도호국단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매년 1회씩 군사 사열을 받아야 했다. 개별 학교의 재학생들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의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도열한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줄 맞춰 행진하며 받들어총을 하는 연습을 몇 달씩 하였다. 공부를 잘하며 리더십이 돋보이는 학생 중 신체 건강한 이를 선발하여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게 했다. 또 다른 한 축엔 선도부라는 학생 조직도 있었다. 대개는 몸집이 크고 완력이 좋은 학생 중, 학교 성적이 어느 정도 상위에 속하는 아이가 선도부장을 맡았다. 일종의 학생 자치 조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군사독재의 하부구조가 학교에까지 스며든 양태였다. 이들의 위상은 일반학생들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한편, 1978년 당시 고등학교 2, 3학년이었던 학생들의 현재 나이는 만으로 64세 정도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불과 며칠 전까지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였던 이와 나이와 겹친다. 더욱 특별한 것은 국방부 장관이라고 불리던 이의 학창시절 약력이다. 고등학교 때 그는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지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같은 학교 일 년 선후배 사이로 동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의 내면은 군사독재체제하에서 '권위 놀이'라는 역할에 매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친위쿠데타로 탄생한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이 그들에겐 아름다운 호시절이었다. 그러니까 후보자 시절, 독재자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알량한, 하지만 한편으론 섬뜩한 권력 놀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름에 오명을 덫 쓰였는지 생각해 보면 화가 치민다. 56년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 이름을, 군 조직을 사유화한 '충암파'라는 이름으로 더럽혔다. 6⋅25 전쟁 당시, 학도호국단의 전신이랄 수 있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목숨 받친 어린 영혼들의 이름을 더럽혔다. 707 특임대라는 멋진 이름으로, 테러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최정예 엘리트 군인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내었다. 누구보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군 장성의 이름도, 국민의 삶과 나라의 살림을 챙겨야 할 국무위원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추락시켰다. 국민이 부여한 대의 기능으로서 국회에서 투표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퇴장한 여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더럽혔다. 게다가 그들 정당의 이름은 국민을 도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지금 국민의 이름에까지 오물을 끼얹고 있다.
▲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 집회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앞에서 열린 가운데 가수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
ⓒ 권우성 |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자 한림대학교 미디어 스쿨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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