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 울고 웃은 스톡홀름…현지 극장 낭독회 전석 매진
"제가 쓴 유일한 사랑 이야기죠(my only love story)"
13일(현지시간) 오후 7시 스웨덴 스톡홀름 로열 드라마 시어터. 한강이 장편 『희랍어 시간』을 소개하자 객석에는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스웨덴 기자이자 번역가인 유키코 듀크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言)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라고 책을 소개하자 덧붙인 말이다.
이 왕립극장 720석은 한강의 낭독과 대담을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로 꽉 찼다. 표는 시야가 제한되는 3층 발코니석까지 전부 매진됐다. 교민과 출판계 관계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인이었다.
‘노벨 주간’ 마지막 행사인 이날 첫 질문도 계엄이었다. 지난 6일 첫 기자회견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자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물었다. 한강은 “5일에 한국을 떠났고 이후 많은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에 한국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나쁘지만은 않다”며 “시민들이 보여준 진심과 용기, 맨손으로 장갑차를 막으며 군인들을 포옹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계엄에 대한 생각을 말하던 중, 깜빡한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어쨌든, 좋은 저녁입니다"(Anyways, good evening)라고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사회자인 듀크와의 대담을 겸한 낭독회는 『소년이 온다』『흰』『작별하지 않는다』『희랍어 시간』의 순서로 소개됐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출간하고 세계를 더 껴안는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며 "'아직 질문이 그대로 있기에 나아갈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12살의 그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를 담은 사진첩을 보고 처음 가지게 됐던 질문에서 『소년이 온다』가 출발했음을 다시 한번 밝힌 것이다.
한강은 7일 스톡홀름에서 한림원에서의 강연에서도 자신 안에 오랜 시간 남아있었던 '그 질문'에 대해 설명했다.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 그는 "장편 소설을 쓰는 일은 질문을 밀고 나가는 일"이라고 했다. 듀크가 "시로 데뷔해 단편 소설을 썼고, 지금은 장편을 쓰는 작가가 됐다"고 말한 데 따른 부연이다.
"장편은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질문과 감각, 그리고 그 시기에 저를 사로잡는 이미지를 통해 글을 씁니다. 그것들이 있어야 시작을 할 수 있어요. 전체 내러티브는 마지막에 드러나고,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면 그때부터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한강의 문장은 스웨덴 배우들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카린쇼를로프, 안드레아스 스벤손 등 배우들이 한강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마지막 순서인 『희랍어 시간』낭독 세션에는 한강이 소설의 한 구절을 한국어로 낭독했고, 이어 쇼를로프가 스웨덴어로 같은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낭독과 대담 사이 사이는 스웨덴 피아니스트 롤란드 푼티넨의 연주가 채웠다.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아이와 그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의 이야기, 『흰』의 낭독에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보였다.
95분 동안 이어진 낭독과 대담, 피아노 연주가 끝나자 한강의 책을 손에 든 시민들이 무대로 몰려들었다. 한강은 사인을 요청하는 시민들의 책을 건네받기 위해 꽃다발을 가슴팍에 안은 채로 쪼그려 앉아 자신의 이름 '한강'을 한글로 써내려갔다.
한강이 무대에서 사라진 뒤에도 시민들은 오래도록 극장에 남아 사진을 찍으며 현장에서 판매하는 책을 들여다봤다. 극장을 찾은 리사오버그(76)는 “『흰』을 읽고 작가를 직접 보고 싶어 낭독회를 예약했다”며 “오늘 대담 중 ‘흰 것의 목록을 쓰고 나니 모두 근원적인 것이더라’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노벨상 수상자) 강연문을 쓰며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좌표를 알게 됐다”는 한강의 좌표 한 지점이 스웨덴 독자들의 마음에 남은 시간이었다.
스톡홀름=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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