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책과 길] “식물은 유일한 자급자족 생명… 완벽한 존재”
이상권 지음
별꽃, 416쪽, 2만1000원
소년은 강가에서 태어났다. 본능적으로 물이 좋았고, 풀밭에 소를 키우고 자라며 풀도 좋아했다. 언제부턴가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를 꿈꿨다.
어느 날 만화책으로 된 장 앙리 파브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었다. 자기 이야기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식물과 동물을 좋아하면 과학자가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중학교에 가자마자 과학자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선생님은 “과학도 못 하는 놈이 무슨 과학자냐”고 핀잔을 줬다. 그렇게 꿈을 포기했다.
대학은 국문과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 후배 집에서 일본어로 된 ‘파브르 식물기’를 발견했다. 밑줄을 긋고, 책갈피에 빼곡하게 메모를 해가며 해독했다.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지만 여전히 무명작가였던 소년은 문학보다 과학, 특히 생물학책을 더 많이 읽었다.
소년만의 ‘식물기’를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파브르식물기’를 처음 읽고 40년 만에 ‘소년의 식물기’를 펴냈다. 소년은 책을 쓰면서 “식물이란 자급자족하는 유일한 생명, 그러니까 가장 완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완벽한 존재란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타자를 존중하고 같이 살아가는 철학적 힘을 가진 생명을 뜻한다”고 말한다.
책은 식물의 어린눈(芽)의 탄생부터 땅속에 단단한 터전을 일구는 뿌리, 중심을 잡는 줄기, 영양분을 비축하는 열매 등을 종횡무진 누빈다. 책의 처음과 끝까지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시어(詩語)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워진다. 그 속에 과학적인 설명은 숨어 있다.
장차 줄기와 잎, 꽃을 만드는 어린눈은 생명 연장 장치다. 추위에 약하다. 나무는 겨울을 버텨낼 수 있도록 방한복을 입힌다. 겉옷은 방수가 잘되는 비늘로, 내피는 털을 빼곡하게 붙였다. 나무는 수천년 동안 어린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해 냈다. 동백나무 꽃눈 속에는 67벌의 옷이 쟁여져 있다. 저자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니라 적절한 공간 배치에 대한 전략을 짜고 하나하나 옷을 입힐 때도 강약 조절을 하면서 여백을 지우는 것이 나무의 지혜”라고 말한다.
한해살이풀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짧은 시간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린눈에게 좋은 옷을 입히지 않는다. 대신 겨울이 오기 전 자식을 퍼뜨려야 하기 때문에 그저 날마다 일하며 살아간다. 단 며칠 만에 어린눈은 성숙해진다. 새로 생겨난 가지에는 금세 눈이 생기고 그 눈은 또 몇 시간 만에 새로운 후손을 만들어 낸다. 나무들이 한 해에 한 세대밖에 만들지 않는 것을 보면 풀은 엄청난 속도전을 벌인다. 저자는 “그런 부지런함 때문에 풀들은 나무에게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눈에서 시작한 나무는 수십년에 걸쳐 성장해 간다. 뿌리와 잎, 줄기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각자의 의견을 조율한다. 뿌리는 흙속을 파고들어 물을 확보해 줄기와 잎으로 보낸다. 줄기는 뿌리 때문에 중력에 저항해 넘어지지 않고 물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 뿌리는 줄기를 통해 잎에서 만들어진 영양분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저자는 “나무는 특정 정치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사회가 아니라 시민 모두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사회”라며 “나무 공화국이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공화국에서는 남쪽에서 햇살이 많이 들어오면 그쪽으로 가지를 많이 배치한다. 당연히 그늘에서 사는 가지는 약하고 가난하다. 공화국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서 사는 시민이 벌어들인 수입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다. 그런 식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면서 개인의 삶을 존중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나무는 몸속에 자신의 기억을 새기며 살아간다. 그 나이테를 보면 나무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나이테의 경계가 넓다면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좁다면 힘겨운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나무는 몸이 약해지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않고 자기 몸을 챙기는 ‘해거리’를 한다. 해거리를 한 해에는 자기 몸만 신경 쓰기 때문에 나이테 간격이 넓어진다.
저자는 나이테를 ‘나무의 비망록’이라고 부른다. 나무가 해거리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참나무 종류의 열매인 도토리가 풍년이 들면 다람쥐 같은 동물은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고 그만큼 참나무 후손이 번성할 기회가 줄어든다.
저자는 나무가 일부러 해거리를 한다고 설명한다. 참나무가 해거리를 한 해에는 도토리를 먹고 사는 동물들이 타격을 입고 줄어들어서 그다음 해에 도토리를 많이 매단다. 줄어든 동물들은 그 많은 열매를 다 먹어치울 수가 없다. 그때 많은 도토리가 땅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참나무가 해거리 작전으로 자기 후손들을 보호하는 셈이다.
책의 마무리는 역시 식물 예찬이다. 식물은 태양의 후원을 받아 생명이 필요로 하는 온갖 물질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살아 있지 않은 물질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힘을 불러낼 수 있는 생명체는 식물이 유일하다”면서 “식물의 시간이 멈추는 순간, 세상 모든 생명의 물결이 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식물의 자비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식물이 만들어 내는 온갖 영양분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극히 단순한 동물일 뿐이다. 식물은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할 수 있을지 그건 모른다.”
⊙ 세·줄·평★ ★ ★
·식물을 진정으로 사랑한 소년만의 아름다운 식물기다
·식물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시종일관 비유가 등장해 세심한 읽기가 필요하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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