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강이 20대 초반에 쓴 단편 소설들

김성호 2024. 12. 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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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61] 한강 <여수의 사랑>

[김성호 기자]

요즘이야 아동학대지만, 어릴 적엔 그런 일이 많았다. 말 안 듣는 아이를 발가벗겨 내쫓는 일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째서 옷을 다 벗겨 내보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선은 번거롭고 아이에게도 오래 상처가 될 테니.

이해가 된 건 어른이 된 뒤였다. 꾸중해 집 밖으로 내쫓은 아이가 홧김에 먼 곳에 가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옷을 벗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이른 것이다.

오랜만에 이 이야기가 나온 건 한강의 소설 <여수의 사랑>을 읽고 둘러앉은 모임에서였다. 나야 한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읽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로 찾은 자리였다. 아쉽게도 모두가 한강의 작품과는 친해지지 못했다 했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강의 작품에 다가서는 한 가닥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깨달음이었다.
▲ 여수의 사랑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20대 한강, 날 것 그대로의 소설들

한강이 이십대 초반 쓴 단편들을 모아 처음 낸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이다. 도대체 제목이 왜 사랑이냐는 이야기부터, 또 책을 내고 가진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반복한 말까지가 하나하나 언급되었다. 그러나 막상 책 가운데 실린 작품들은 아름다움이며 사랑과는 영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가 통상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을 때 기대하게 되는 요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를 두고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인데, 그중 누가 앞의 옷 벗겨 쫓겨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제가 어릴 적 팬티까지 벗겨가지고는 집 바깥에 잠시 쫓겨났던 일이 있었단다. 내 삶이 이대로 끝나는구나 하는 초등학생치곤 대단한 감상 이후에, 그는 제가 입고 쓰는 것들이 모두 제 부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피부로 체감하였다고 했다. 옷가지 하나에도 감사하게 되었다던가. 그러니까 흔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사라지고 나면 보이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여수의 사랑>엔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 '여수의 사랑'을 시작으로,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마지막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작인 '붉은 닻'까지, 스물셋부터 스물넷까지 약 일 년 간 쓴 작품들을 추려 묶은 것이다. 개정판을 내며 비관과 절망의 정서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저녁빛'을 제하고 그나마 시대 분위기와 통하는 작품들만 남겼다.

그렇다 해도 부커상에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그녀의 초기작들을 날 것 그대로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오늘까지 이어진 한강문학의 은근하고 도도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단 점은 분명하다.

고통과 비관... 20대 한강의 모습들

한강 소설의 특징이라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우선 익숙지 않은 이에겐 각종 묘사가 장황하리만큼 많고, 대개 어딘가 아프거나 아파보이는 이들이 등장하며, 관념적인 이야기와 모호한 문장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근작인 <소년이 온다>며 <작별하지 않는다>에서까지도 선명히 발견되는 이 같은 특징이 <여수의 사랑>에 실린 작품 가운데서도 어김없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한강문학의 뿌리깊은 주제와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이란 평이 많이 나온 건 '어둠의 사육제', 전 재산을 잃고 이모의 집에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된 여자 영진의 이야기다. 상경해 일하며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 돈을 벌어 대학교까지 졸업하겠단 포부를 가졌던 그녀가 결코 반길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변화하는 과정의 소설의 전반을 이룬다. 서울에 유일하게 의탁할 곳인 이모집을 찾아서 서러운 눈물을 쏟은 끝에 더부살이를 시작한 그녀다. 처음엔 눈치가 보여 집에도 식사가 모두 끝난 뒤에나 들어가고 했던 그녀가 마침내는 지지 않고 하고픈 말 다 할 줄 아는 악다구니가 되는 과정을 자연스레 비춘다.

소설은 조카들의 성화로 같은 방을 쓰지 못하게 된 영진이 베란다에 제 자리를 튼 뒤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한 쪽 다리가 없는 사내 명환이 그녀에게 제 아파트를 주겠다 나서는 것이다. 그는 제 집에서 영진이 사는 베란다가 보인다며 그녀를 섬뜩하게 하더니 조건 없이 제 집을 넘겨줄 테니 받으라는 믿기 힘든 제안을 한다.

사연인 즉, 임신한 아내와 배 안에 든 자식까지 차에 치여 떠나보낸 그다. 그간 복수심에 불타 차를 몬 이를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으나 이 아파트에 살았던 그의 집이 이사를 가며 의미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제겐 필요가 없어진 아파트를 넘기고 생을 비관하여 다른 선택을 하려는 거다. 집이 절실한 여자와 집은 있으나 필요가 없는 남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격과 자산을 견준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더욱 호소력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결국은 아름다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야간열차' 가운데 어느 대목이었다. 동걸이란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영현이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그의 집에 처음 방문한 뒤의 이야기다. 전날 머리꼭대기까지 술을 마시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들어간 그의 집에서 눈을 뜬다. 민망함을 딛고 일어난 그에게 동걸의 어머니는 제 아들이 친구를 데려온 게 처음이라고 다정히 말해주는 것이다.

동걸의 어머니는 내 사과에 답하는 대신 석유곤로에 데운 물을 대야에 담아주었다. 내가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물을 비우자 그녀는 빈 대야에 다시 더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손으로 온도를 가늠해가며 찬물을 틀어주었다. -167p

일어나면 씻을 물을 준비한다고 석유곤로에 물을 올려 덥히고, 아들 같은 아들 친구가 세수하는 모습을 보며 빈 대야에 다시 물을 부어주는, 그것도 손으로 온도를 가늠해가며 너무 뜨겁지 않도록 찬물을 틀어 섞는 그 마음씀이 짤막한 문장들 사이로 비어져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나는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한강이 남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작품마다 드러나는 관념적이며 비현실적 사건과 대사가 아쉽단 평에 상당부분 공감하면서도 이 소설집에 만족을 표할 밖에 없다.

한강은 이 소설을 쓴 뒤 가진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것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 가운데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고통과 분노와 절망 따위가 흩뿌려져 있는 듯하다. 마치 더욱 참혹한 고통을 다룬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써낸 뒤 그것이 사랑이야기라고 주장했던 것만큼이나 당혹스럽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에 발췌한 짤막한 구절에서 엿보이듯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또 우정과 사랑에 대한 흔적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너무 흔한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이러한 요소들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도 한다. 마치 발가벗겨져 쫓겨난 뒤에야 옷과 집, 부모가 준 애정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수의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움이며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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