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집강소 통치

이윤영 2024. 12. 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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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46]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개입

[이윤영 기자]

전봉준과 김학진의 집강소 통치 담판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민주자치기구인 집강소 설치를 강행하면서 일부 지역에서 강한 반발로 인해 무력을 사용하면서 혁명을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동학의 움직임에 전라감사 김학진은 특별대책을 안 세울 수가 없었다. 한양의 다급한 소식에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비상이 걸렸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 일본군 경복궁 점령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기록화이다.(오토리공사 대원군 옹호 입성도) 본 그림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김학진은 일본군이 6월 21일(양7.23)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급보를 받고, 동학군이 집강소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협약을 하기 위해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회담을 갖자고 전봉준에게 제안했다. 전봉준이 김학진의 초청을 받고 전주성에 도착했는데 감영군은 총과 창으로 무장하고 전봉준 일행이 오는 길에 좌우 양쪽으로 정렬했다.

전봉준은 삼베옷에 커다란 갓(관, 冠)을 쓰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의젓하게 입장하였다. 이러한 전봉준의 모습은 김학진 관찰사를 비롯하여 많은 관료와 병정들에게 과히 불세출의 영웅다움을 각인시켜 주었다.

직접민주주의는 시작되고

전봉준과 김학진은 7월 6일(양8.6) 선화당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김학진은 청군과 일본군의 외세개입은 국가의 존망이 시급한 일이라 동학당의 요구를 가감 없이 들어줄 것이니, 나라의 정세안정에 협조를 당부한다고 하였다. 전봉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학진에게 '전라감영과 지방관아의 행정권을 이양해 주라'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김학진은 '동학군은 모든 무기를 반납함은 물론, 군대를 몰고 돌아다니지 말고 혁신에만 치중하라'고 응수했다. 전봉준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소수 병력과 호신용 무기만을 소지하고 다닐 것'이라고 말해 서로 간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전봉준은 조선정부에 올린 27개조 폐정개혁안 외 각 집강소에 걸어두고 혁신을 추진하는 데 꼭 필요한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 동학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원암 오지영 선생이 집필했으며, 1924년 초고본과 1938년에 탈고, 1940년의 간행본이 있다. 이 책은 1940년 11월 15일 간행된 판본이다. 동학군 백산기포와 포고문, 그리고 격문과 12개조 폐정개혁안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오지영의 동학사 원본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김학진은 결국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받아들였으며, 이전의 27개조 개혁안도 성실히 수행함은 물론 오늘의 협약 내용을 조정에 바로 보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폐정개혁안 12개조는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때 학계에서는 12개조 폐정개혁안에 대해 오지영 선생이 창작했다고 의심까지 했으나, 현재는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봉준 재판기록 등에 나오는 27개조 폐정개혁안을 12개조로 함축하였고, 또 오지영의 정무감각에 의한 문학적인 글 솜씨가 돋보이는 것 등 최근에는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 보두네 신부 신변 보호 요청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조정의 전령이 가지고 온 서찰의 내용을 말하며 특별히 부탁하였다. '프랑스 정부가 조선 정부에게 보낸 협조 사항이다. 동학당이 전주성을 함락시킬 무렵, 서학의 보두네 신부가 민가에 피신했는데 그를 안전하게 한양으로 보내야 한다. 프랑스가 정부에게 신변 보호 요청을 했고 전라감사는 책임지라는 조정의 명령이다' 등의 내용이었다.

전봉준은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그 프랑스 보두네 신부는 당시 전주성당 신부로서 전봉준에 의해 안정하게 피신하였고 동학과 서학은 정부의 탄압에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후 김학진 전라감사는 동학의 일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의미로 일명 '(동학)도인감사'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전라감영 선화당 지난 2020년 10월 복원된 전라감영 선화당에 동학농민혁명과의 연관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2022년 6월, 선화당의 종전 안내판 옆에 새로 새워졌다. 본 '동학농민혁명과 선화당'이란 제목의 안내판은 동학혁명기념관(이윤영 관장)의 제안으로 전 김승수 전주시장이 받아들여 새로 설치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장
▲ 동학농민혁명과 선화당 안내판 동학농민혁명과 선화당 안내판의 내용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선화당을 집강소 총본부로

전봉준은 전라감영의 행정권을 이양받아 송희옥 비서를 도집강으로 임명하고,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대도소 겸 집강소 총본부로 정하였다. 또한 호남 일대 각읍 집강에게 '평민을 침학하지 말고 치안을 유지할 것이며 무기와 공물을 반납하라'는 통문을 띄웠다. 또한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 등 모든 동학 조직에 전라감영의 행정권 이양과 집강소 통치의 민권 자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통문을 띄웠다.

전봉준은 전라우도를 전봉준, 전라좌도를 김개남의 관할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우도와 연결되는 무장, 고창을 중심으로 광주와 해안일대는 손화중과 최경선의 관할구역으로 정하였다. 또 각군의 관아 또는 재실 등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집강, 서기,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蒙) 등을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민주자치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각 집강소에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일제히 걸고, 27개조 개혁안과 함께 민주자치를 단행하였다. 이때 군수(郡守)들은 이름뿐 행정과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였고, 일부에서는 협조하지 않는 군수를 쫓아내니, 관리들은 모두 동학에 가입하여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하였다.
 부안 송정리 동학도소(집강소)터 사진은 부안군 행안면 송정마을의 영월신씨 재각이 있는 옛 동학도소 즉 집강소터이다. 1894년 부안 동학 대접주 김낙철이 동학 도소 겸 집강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필자(이윤영)가 건물 천장을 열고 상량의 글을 살펴보았는데, 189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집강소 설치시기가 1894년 이므로 이 건물은 1895년 새로 복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은 줄을 서고

집강소는 민원에 따라 탐관오리 응징과 무명잡세 철폐 등 폐정 개혁에 힘썼다. 또 집강소는 행정관청 이상으로 위세가 대단하여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 동학의 위상도 함께 높아져 갔다. 그러나 일부에서 동학을 빙자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도 있어 별도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영 선화당의 집강소 본부를 송희옥이 책임지게 하고 완산 집강소에 서영도, 서문 집강소에 고문선, 동문 집강소에 이창순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전주성 안과 밖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부랑자들이 동학군이라 자칭하며 민폐를 끼치는 일들을 엄히 문책하여 기강과 규율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에 따라 전주 인근에서만 1만여 명이 새로 동학에 입도하는 마당포덕이 일어났다.

한편 지방관아 중에서 끝까지 동학군의 폐정개혁안과 집강소 설치를 거부한 곳은 나주, 남원, 운봉 등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고심 끝에 가차 없이 저항하는 관아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최경선은 동학군을 다시 정비하여 나주로, 김개남은 남원으로, 김봉득은 운봉으로 각기 동학군을 출동시켰다.

끝까지 저항하는 나주지역
▲ 나주성 최경선 장군은 수천의 군사로 나주를 위협하였으나 나주목사 민종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학군이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전술을 폈으나 수성군이 이에 맞서 대완포와 장대포 등을 쏘아대며 저항함으로 화염과 포성이 산천을 진동시켰다. 동학군의 나주성 공략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하였다. 전봉준 장군이 직접 민종렬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도 실패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최경선은 수천의 군사로 나주를 위협하였으나 나주목사 민종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종렬은 최경선과 동학군이 총공격으로 나주성 점령을 시도하자 별장 박근욱과 도통장 정석진을 좌우에 배치하고 수성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마침내 동학군이 함성을 지르며 한편으로는 성문을 부수고, 한편으로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전술을 폈으나 수성군이 이에 맞서 대완포와 장대포 등을 쏘아대며 저항함으로 화염과 포성이 산천을 진동시켰다. 동학군의 나주성 공략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하였다.

전봉준은 나주성 공략 실패의 소식을 들은 후 최경선에게 공격을 멈추라 하고 직접 나주로 향하여 민종렬을 면담하려 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의 협조공문을 제시하며 끈질긴 설득에 나섰으나, 오히려 암살 위기까지 모면하면서 결국 나주성 점령과 집강소 설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봉득의 운봉 공략은 박문달 등이 돌을 쌓고 저항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고 집강소를 설치, 서정(庶政)을 처리하였다. 김봉득 접주의 비상한 재지와 뛰어난 검술에, 운봉 등 3읍은 동학군에게 완전 장악되었다.

김개남은 남원을 쓸어버리고

한편 김개남은 동학군 수천을 이끌고 남주송을 선봉으로, 김화중을 중군으로 삼아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남원부사 김용헌은 나름대로 방어에 치중하였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김개남은 남원성을 함락시켜 관아를 점령하고 김용헌을 잡아내어 그에게 죄를 따져 묻자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 즉시 참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막강한 김개남 대두령의 영향력에 힘입어, 남원을 중심으로 새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을 넘어섰다. 이로 인하여 조정은 물론 일본에서까지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었다

동학혁명군의 집강소 통치는 그야말로 근대 공화정의 출발이자, 민주주의의 시원이다. 이런 정치개혁 또는 시민혁명 등의 이야기도 경천동지할 충격으로 오겠지만, 사상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사람이 하늘이라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실천에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보편타당하게 국민의 눈높이로 넓혀보면 '모두가 하늘이었다'로 귀결된다. 사람 모두가 원래 하늘이었는데, 하늘임을 모르고 살고 있다가 동학에서 비로소 그 이치, 그 사상, 그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실천함으로 만인을 위한 하늘세상을 열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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