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주도한 '방첩사령부', 이번에도 그냥 둬야 하나
[심규상 대전충청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1월 6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중장 진급·보직 신고 및 삼정검 수치 수여식에서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에게 삼정검 수치를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홍장원 국정원 1차장에게 국회의원을 포함한 체포 대상자들의 위치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지호 경찰청장에게도 비슷한 요청을 했으며, 중앙선관위 청사에 경찰 배치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 '12.3 윤석열 내란 사태'를 수사하는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9일 오전부터 경기도 과천 소재 국군방첩사령부 등에서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압수수색이 진행 중인 국군방첩사령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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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첩사는 국방부 직할부대로 군사보안, 군 방첩과 군사정보와 수사 지원 업무를 위해 설치했다. 구체적으로 국방정보본부와 함께 국정원 국내 파트처럼 국내 군 정보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방첩사 업무 훈령을 보면 정치적 중립 준수(4조), 특권의식 배제(8조), 인권 보호(9조)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방첩사의 역사는 정치 개입과 권한의 오남용, 반인권과 반헌법으로 점철돼 있다.
방첩사의 시초는 1949년 설립된 육군정보국 특무대다. 이후 육군 특무부대(1950), 방첩부대(1960), 육군보안사령부(1968), 국군보안사령부(1977), 군국기무사령부(1991), 군사안보지원사령부(2018)로 이름을 바꿔왔다.
방첩사의 첫 시작은 '불법 계엄' 주도
정부 수립 뒤 최초 계엄이 내려진 땅은 전남 여수·순천 일대(1948년 10월)와 비슷한 시기 제주다. 계엄법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김창룡이 육군 정보국 방첩과 실무자로 나서 정보 요원들은 체포하고 심문했다. 방첩과는 이때부터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을 숙청했다.
김창룡(1920~1956)은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했다. 일제는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며 육군 헌병보조원에서 오장으로 특진시켰다. 이후에도 항일 조직을 적발하는 데 맹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돼 군대 내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숙군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혹독한 고문으로 억울하게 숙청된 사람이 많았지만, 그 공로로 방첩사 전신인 특무대 대장(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꼽힌다.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을 주도했다. 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아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를 색출해 처형했다.
▲ 이승만과 악수하는 김창룡 |
ⓒ 국가기록원 |
이승만은 이 조작 사건을 이유로 1952년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다음날에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납치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통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의 개헌으로 재집권했다.
방첩사는 1979년 국군보안사령부 시절에는 내란을 주도했다. 당시 방첩사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은 전두환이었다. 쿠데타를 막아야 할 부대임에도 전두환은 오히려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과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도 내란을 적극 도왔다.
1980년에는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비상계엄 확대와 국회 해산, 언론통제 등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했다. 이를 통해 야당 인사를 체포 감금하고 국회를 점령했다. 언론대책반을 편성해 보도검열업무를 감독했다. 보안사의 지시를 받은 공수부대는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했다.
▲ 지난 2004년(왼쪽)과 지난 2001년 김창룡의 묘. 국군기무사령관 이름의 조화가 놓여져 있다. |
ⓒ 심규상 |
1990년에는 친위 쿠데타 식 비상계엄이 내려질 경우 방해가 될 만한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작성한 민간인사찰 자료가 폭로됐다. 당시 윤석양 이병이 폭로했는데 민간인들의 성향과 평가, 자택의 배치, 진입과 도주 가능 경로, 친인척 주거지 등 세세한 인적 사항을 사찰해 작성했다. 방첩사가 비상계엄이 발동되면 정권의 반대 세력의 체포 작전을 위한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증거였다.
2007년 대통령선거 때는 야당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댓글 부대를 운영했다. 또 댓글 조작 혐의로 국군기무사령부가 수사를 받자, 자신들을 조사하고 있는 국방부 조사 태스크포스를 감청하기까지 했다.
방첩사는 세월호 참사 보름 뒤인 2014년 5월 초에는 '반정부 시위가 순식간에 악화할 수 있으니 계엄령을 조기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했다. 또 세월호 유가족들을 성향별로 분류하고 사찰했고, 극우 단체에 맞불집회 정보까지 제공했다.
▲ 2016년 10월 24일 당시 조현천 국군기무사령관이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의 국군기무사령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하고 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결국 정부는 해체 후 재건 수순을 밟겠다며 기무사령부를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편했다. 2022년에는 지금의 '국군방첩사령부'로 변경했다.
'계엄령 모의 사건'이 논란이 된 지 7년 뒤인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이 발동됐다. 해당 계엄 문건은 7년 전 계엄령 문건과 흡사했다. 방첩사는 이번에도 계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군인권센터가 9일 공수처에 고발한 비상계엄 관련자 27명 중 방첩사 관계자만 9명으로 관련 부대 중 방첩사가 가장 많다(관련 기사 : 군인권센터가 작성한 '내란 명단 27명' https://omn.kr/2bcii ).
방첩사는 결성직후 이승만 당시 계엄 주도,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2017년 기무사 계엄령 문건 사건에 이어서 또다시 내란을 주도해 '내란 기획부대', '내란 주도부대', '범죄 소굴'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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