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악’ 소리 날 만큼 했죠”…지독하게 무용 사랑했던 장희재씨 [기억저장소]
“희재는 정말 현대(무용)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몸이었어요. 키도 크고 팔다리 길고”.
예술고등학교 시절부터 장희재(사망 당시 43세)씨를 봐 온 친구 박미정(43)씨는 희재씨가 타고난 무용수였다고 기억했다. 희재씨는 175㎝의 큰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긴 팔다리가 특히 눈에 띄었다. 대학 후배 김숙희(43)씨는 “희재 선배는 특히나 상체 움직임이 굉장히 좋았다. 팔 라인을 쓰면서 상체로 표현해내는 움직임이 굉장히 성숙하고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희재씨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 무용수로 무대를 종횡무진 휘저었다. 여성 무용수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충남대 무용학과를 졸업한 희재씨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대무용에만 전념했다. 각종 무용 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받았다. 학업까지 병행했다.
숙희씨는 희재씨를 두고 “무용을 지독하게 사랑한 사람”이라며 “선배를 보면 ‘나는 무용을 저만큼 사랑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고 말했다.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희재씨였기에 이별은 더 갑작스러웠다. 희재씨는 지난 3월 9일 대전 부모님 댁에서 두 아들과 함께 잠을 자던 중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6일 충남대병원에서 4명에게 폐와 간, 좌우 신장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희재씨는 김광숙(69)씨가 첫째 딸을 낳고 5년 만에 얻은 귀한 둘째였다. 그는 “희재 같은 애는 3명도 키우겠다고 얘기할 정도로 애가 순했다”고 했다. 희재씨는 여덟살 때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칭얼거리지도 않을 정도로 의젓한 소녀였고, 스스로 물수건을 적셔 이마에 올려놓을 만큼 어른스러운 딸이었다.
광숙씨는 희재씨의 태몽 이야기도 들려줬다. 커다란 거북이가 자신을 향해 오다 고개를 들고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고 한다. 광숙씨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난 우리 희재가 장수할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살 터울인 남동생에게도 희재씨는 든든한 누나였다. 성구(42)씨는 누나와의 추억담을 소개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였는데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개천이 있었어요. 친구들이랑 장난치다가 실내화 가방을 도랑에 빠뜨린 적이 있어요. 그때 누나가 개천을 둘러싼 높은 턱을 바로 넘어가더니 실내화 가방을 건져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희재씨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전까지 수학 영재반에 들 정도로 학업 성적이 좋았던 둘째의 선언에 가족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이었는데도 입시 준비 석 달 만에 희재씨는 당당히 예고 입학증을 따냈다.
언니 혜선(46)씨는 동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희재는 뭘 해도 ‘악’ 소리 나게 해야 발 뻗고 자는 애였어요.”
실제로 희재씨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도 방학이면 일기를 쓰는 일도 미룰 때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구씨는 미련해 보일 정도로 매사에 열심인 둘째 누나가 걱정돼 말린 적도 있다. 그럴 때면 희재씨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나 그렇게 해라. 난 그렇게 안 산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던 이가 희재씨였다. 덕분에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대학교에선 ‘장희재 사단’이 있을 정도였다. 학교 후배들은 예쁜 무대 의상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희재씨의 털털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들은 “희재 덕분에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힘든 공연 연습을 견딜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후배 숙희씨에겐 자신의 삶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마운 사람이 희재씨다. 희재씨는 남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무대 리허설을 끝내고 내려왔는데 희재 선배가 ‘숙희야 진짜 너만 보였어. (동작에) 힘이 왜 이렇게 좋아’라면서 칭찬을 해줬어요. 무용을 하면 자신감을 잃고 슬럼프에 빠질 때가 오는데 그때 어디서도 듣기 힘든 칭찬을 해준 게 희재 선배였어요.”
희재씨는 이미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쉴 틈 없이 바빴지만 봉사활동도 다녔다. 미혼모들을 상대로 무용을 기반으로 하는 ‘매트 필라테스’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멀리까지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 그만두라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언니 혜선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릴 때마다 희재가 그러더군요. 대학에서 가르치는 애들보다 더 어린 애들이 미혼모가 돼 있다고, 그런데 내가 가서 몸을 풀어주면 애들이 너무 좋아한다고, 난 어떤 수업보다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이런 말을 하던 희재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무용이 전부였던 희재씨의 목표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줄 수 있는 선배가 되는 것이었다. 무용학과 교수가 돼 후배들이 자유롭게 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희재씨가 가끔 와 머물던 혜선씨네에는 아직도 희재씨가 읽던 책들이 쌓여 있다. 혜선씨는 “희재는 모든 아이디어를 책에서 얻었다”며 “철학을 모르고는 예술을 논하지 말라면서 나한테도 항상 ‘책 좀 봐’라고 말하던 아이였다”며 웃었다.
희재씨와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닥쳤지만, ‘20분의 기적’ 덕에 누군가에게 생명을 선물할 수 있었다. 심장마비로 쓰려진 희재씨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돼 1시간30여분간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의료진은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20분만 더 심폐소생술을 벌이기로 했고 그때 기적처럼 자가 호흡의 순간이 돌아왔다. 물론 희재씨는 끝내 깨어나진 못했지만 그 순간 덕분에 장기를 살릴 수 있었다. 동생 성구씨는 “그 시간 덕분에 장기를 살리는 조치를 할 수 있었다”며 “그런 우연이 장기기증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족 중 가장 먼저 장기기증을 결심한 건 어머니 광숙씨였다. 광숙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20여년간 신장 혈액 투석을 하며 고통 속에 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신장 투석 때문에 해외에 있는 아들들을 보러 가는 것조차 어려웠던 어머니를 보면서 장기기증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광숙씨는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 전날까지도 투석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할 정도로 비참할 때도 있었다”며 “의료진에게서 언뜻 장기기증 하는 방법도 있단 얘길 들었을 때 곧바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떠난 희재씨를 기린다. 지난 추석, 후배 숙희씨는 희재씨가 생전 좋아하던 애호박전을 들고 추모 공원을 찾았다. 숙희씨는 “선배가 저 결혼하고 집들이 왔을 때도 바빠서 먼저 들어가면서 ‘숙희야 나는 호박전~’ 했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며 “선배가 맥주도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나름대로 시원한 맥주 먹이겠다고 얼음이랑 같이 바리바리 들고 가서 앞에 놓고 얘기하고 왔다”고 떠올렸다.
동생 성구씨는 “누나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살면서 누나한테 따뜻한 목소리와 말투로 안아주면서 고마움을 표현한 적이 없는 것 같다”며 “늘 소리 소문 없이 옆에서 도와주던 사람이었는데, 다시 만나면 고맙다고 꼭 얘기하고 싶다”고 눈물을 삼켰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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