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전주완산전투의 서막

이윤영 2024. 12. 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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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42]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 들불처럼 타오르다

[이윤영 기자]

▲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1894년 4월 27일(양.5.31)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사건을 기념하여 1991년 8월 완산칠봉 전적지에 건립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주성 점령이라는 쾌거를 부르기도 전에 관군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주성과 완산칠봉 사이 총격과 포성이 그칠 줄 몰랐다. 동학군에게 빼앗긴 전주성, 다시 빼앗으려는 관군, 그들에게는 사는냐 죽느냐의 운명이 조선의 운명과 맞물리면서 한치 양보 없는 완산 대회전(大會戰)은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관군의 인원은 확충되고

동학농민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된 이튿날 아침이 밝아오자, 그동안 동학군에게 농락당하며 뒤꽁무니만 쫓던 홍계훈의 경군은 금구 원평에 잠시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홍계훈 초토사와 경군(이하 관군, 관군연합군)은 그동안 흩어진 감영군들을 거의 수습하였고, 지방군과 향군까지 거느려 4천여 명이 넘어서는 군사를 보충하였다.

전봉준 총대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전주성을 점령한 사실이 한양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 관군은 증원될 것이며, 관군소속 관변군사들까지 합치면 동학군 숫자와 비슷해질 것이다. 한양 진격은 보류하고 무기와 식량 등 군수품들을 충분히 확보하여 장기전을 준비해야한다' 등의 전략분석이었다.

전봉준과 지도부가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전령들의 보고가 연이어 들어왔다. '원평에서 관군연합군이 좌군과 우군으로 나뉘어 금구대로와 청도리 고갯길로 출발했다. 왕명으로 전국의 관군과 향군은 물론 민보군을 모집하여 곧 전주로 출발할 계획이다. 특히 청군과 일본군이 곧 조선을 삼키러 온다' 등의 보고였다.

외세개입은 걱정되고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연이은 보고를 들으며 관군의 움직임을 종합 분석한 결과, 전주성을 포위하여 옥죄려는 전략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대책을 서두르기로 하였다. 특히 청군과 일본군의 조선 진출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예상 밖이었다. 전봉준은 우려했던 외세 개입이 시작되어 국제 전쟁으로 확대될 경우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홍계훈의 관군연합군은 동학농민군에게 속아 헛걸음을 연발하면서 동학군이 지나간 곳의 부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죄 없는 백성들만 탄압하였다. 그들은 화풀이와 노략질을 일삼으면서 원평에 이르렀다. 결국 원평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전주로 출진하여, 4월 28일 정오에 전주 용머리고개를 거쳐 완산에 진을 쳤다.

전주성은 포위되고

홍계훈은 관군연합군의 본영을 완산 중턱에 설치하여 전주성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경군을 비롯한 강화영병과 전라감영병은 전략상 곤지산, 기린봉, 건지산, 다가산, 황학산 등에 분산 배치하였다. 관군연합군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의 관군을 포위할 때보다 더욱 철저하게 전주성을 포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조선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임명하여, 장어영·통위영·평양영의 1천 5백여 명의 군사들을 인솔하게 하였다. 또한 전국의 향군과 민보군을 총동원하여 경군과 함께 전주성의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 당시 전주시가지의 모습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주시가지 사진이다. 본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완선전투의 서막이 열리다

관군연합군은 전라도는 물론 전국에서 몰려오는 관군·향군·민보군들이 합세한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관군들이 전주로 집결하면서 완산전투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완산전투는 4월 28일 완산을 중심으로 다가산의 서쪽 황학산에 결진해 있던 관군이 먼저 대포 수십 발을 전주성 안으로 발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성안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관군연합군을 격파하고 한양으로 직행할 계획을 실현하고자 전투를 서둘렀다. 관군은 대포 발사에 이어 기관총과 소총은 물론 불화살을 성안에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관군의 공격으로 이태조 영정을 모셨던 경기전과 관청 일부가 파괴되었다. 또한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백 채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홍경래 의거 때 정주성을 점령하고도 성을 지키는 수비로 일관하다가 결국 관군이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일거에 함락되고, 홍경래도 사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어와 수비에 일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공격해 위기에서 탈출하기로 하였다.
▲ 전주 경기전 안내도 전주 경기전 안내도 전주 용머리 고개와 완산 등에서 관군은 대포를 발사하고 기관총과 소총은 물론 불화살을 성안에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관군의 공격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셨던 경기전과 관청 일부가 파괴되었다. 또한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백 채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 동학혁명기념관
공격으로 전략은 바뀌고

전봉준은 공격을 통해 관군의 혼란과 분산을 유도해 일거에 섬멸한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이때 동학농민군 등에는 탄환을 물리치기 위해 황색지에 동학주문(呪文,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을 써서 붙였다. 그리고 동학군 모두는 동학 주문(呪文)을 외우게 하였다.

전봉준 총대장은 긴급하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먼저 최경선과 기마병이 세 갈래로 나누어 관군의 주요 거점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중군은 나를 따르고, 좌군은 김개남 총관령, 우군은 손화중 총관령을 따라 출동하라!"

관군연합군의 포격에 맞서 최경선의 기마병이 서문을 열고 관군의 주요 거점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또 전봉준이 이끄는 중군은 차치구를 선봉에, 송두호와 송대화를 좌두령과 우두령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전봉준 부대는 서문을 빠져나와 용머리고개를 치는 척하다가 매곡 건너 검두봉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김개남의 좌군은 김인배를 선봉으로, 남주송과 김중화를 좌두령과 우두령으로 진용을 갖췄다. 김개남 부대는 소총과 도끼로 무장하고 남문을 나와 백포장(白布帳, 흰 베로 만든 휘장)을 앞에 펴고 투구봉을 치고 올라갔다. 손화중의 우군은 김규일를 선봉에, 임천서와 강경중을 좌두령과 우두령으로 진용을 갖춰 소총과 활로 무장하고 황학산을 향해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주성 안의 동학농민군들은 성벽 위에서 성 밖의 동학군을 지원 사격하였다. 그들은 완산과 황학산 언덕의 군연합군을 향해 대포와 소총을 소나기처럼 갈겨댔다. 완산과 다가산의 언덕에서 기다리던 관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는 곧바로 대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했다. 이로 인해 동학군에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 동학혁명기록화 동학농민군과 관군연합군은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본 사진 동학혁명기록화는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백병전은 시작되고

동학농민군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으며 사생결단으로 동학의 주문을 외우면서 산천을 울리는 함성과 함께 적진으로 기어올랐다. 위험에 처하게 된 관군은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강화포병들의 집중 포격과 사격으로 동학군의 접근을 차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퇴로가 막힌 관군이 궁여지책으로 앞으로 치고 나오면서, 뒤로 밀리던 동학군들과 밀착된 상태로 일대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연합군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엉키면서 총과 활보다는 창과 칼, 죽창을 앞세우고 목숨을 건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백병전이 시작되자, 제일 먼저 김개남 부대가 기습공격으로 적진에 뛰어들었으며, 경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경군연합군들이 겁을 먹고 혼란에 빠지자, 전봉준과 손화중 부대가 뒤를 받치며 경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봉준의 칼끝은 관군들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며 번개처럼 베었다. 전봉준의 왼쪽에는 손화중이, 오른쪽에는 차치구가 있었다.
▲ 전주완산전투벽화조형물 동학농민군 전주완산전투 벽화조형물은 전주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김개남의 장도끼는 바람을 가르고

김개남은 과감하게 적진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석양의 노을빛에 빛나는 김개남의 장도끼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검붉은 핏방울이 매곡에 뿌려졌다. 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힘없이 무너졌으며, 완산 주봉과 검두봉 사이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관군의 지도부와 장군들은 벌써 어디로 내뺐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관군은 완산 주봉 쪽으로 재빨리 도망친 장군들을 따라 다 같이 도주하였다. 관군연합군을 동학농민군이 바짝 뒤쫓으며 살상을 시도하자, 전봉준이 말렸다.

"날이 어두워진다. 경군도 우리 백성이다. 추격을 멈춰라!"

첫 완산전투가 끝나고 난 후, 완산 기슭과 매곡에는 시신 수백 구가 널려 있었다. 양쪽 다 피해가 컸으나 동학군의 승리였다. 전봉준은 치열한 전투에서 회군한 동학군들에게 휴식을 권하면서 부상자들의 치료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 동학군보다 더 심한 타격을 입은 관군도 포와 총으로만 응수할 뿐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완산전투 이튿날인 4월 29일(음), 이두황을 중심으로 한 관군은 기습적으로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불태우며 동학군을 유인하였다. 전주성 안팎 백성들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동학군은 또다시 출정하기로 결정했다.

동학농민군은 중군, 좌군, 우군, 기마군 등 총동원되어 동문과 서문, 남문과 북문 등 사대문을 열고 출진하였다. 동학군은 우선 황학대(黃鶴臺)로 돌진하였다. 위험에 직면한 관군연합군은 완산 본진의 화포 공격을 중심으로 집중 발사하며 방어에 돌입했다. 관군의 엄청난 화력에 동학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성벽 위에서 포격과 사격으로 맞섰다.

황학산 위로 겨우 도망친 관군은 지난번 백병전에서 큰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접근전을 피하면서 화력이 우수한 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맞서기만 하였다. 전주성 망루에서 이를 지켜보던 전봉준은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게 하여 동학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관군에 비해 화력에서 약한 동학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번 전투에서 동학군과 관군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관군이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어느 날, 필자가 근무하는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중학생들이 현장학습으로 단체관람을 온 적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해설을 듣고 한 학생이 '동학군과 관군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왜 총칼을 들고 싸웠냐?'는 질문을 하였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질문에 답을 해주면서 진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동학혁명에 대한 전체적인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때의 답을 대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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