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으로 국회를 공격한 친일군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1981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 기사 "전환기의 내막 <190> 발췌 개헌 ⑨ 비상계엄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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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이라 자가용을 이용할 수 없었던 의원 47명이 26일 아침에 통근버스를 타고 임시 의사당인 경상남도청을 향했다. 버스가 도청 정문을 통과할 때의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이 그곳에 미리 도착해 있었던 김문룡 경향신문사 기자다. 1981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에 그의 목격담이 실렸다.
"버스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정문을 통과하려 하자, 정복·정모에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상관의 지시에 따라 불심검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스에 타고 있던 야당 의원들은 이유 없이 헌병에 의한 검문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헌병들의 검문 사유는 버스 안에 빨갱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문룡 기자는 헌병들은 빨갱이를 잡겠다며 버스에 승차하려 하고 의원들은 버스 문을 잠근 채 헌병대에 저항하고, 길 가던 행인들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며 몰려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러 정오경이 되자 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됐다.
"이윽고 헌병대에서 보내온 견인차가 버스의 뒷범퍼를 추켜들고 끌고갔다. 끌려간 의원 중 임흥순(민국)·서범석(민국)·김의준(민우)·이용설(무소속)·이석기(원내자유) 의원 등은 국제공산당 혐의로 즉석에서 구속됐다."
운전석 쪽을 들어 올리면 승객들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기가 쉽지만, 뒷쪽을 들어 올리면 그게 다소 곤란해진다. 계엄군이 고약한 방식으로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견인해 갔던 것이다.
당시 계엄법 제11조 제1항은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이를 공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으므로 계엄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계엄하에서도 국회 기능만큼은 살려둬야 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원 통근버스 뒤 범퍼를 들어 올린 채 견인하는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한 의사 출신
이를 실무적으로 주도한 원용덕은 대한제국 멸망 2년 전인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193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 출신이다. 그런 그가 1952년의 계엄선포 다음날 국민을 위협하는 포고문을 발포했다. 이 포고문의 결론 부분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선포 직후에 박안수 계엄사령관이 발포한 포고령 제1호의 결론과 비슷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은 '전공의 처단'까지 거론되는 포고령의 결론 부분에서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원용덕은 "이상(以上) 치안에 관하여 비협력 또는 범과(犯過)를 할 시는 계엄법 제13조에 의거하여 예비구속 또는 체포·수사 등에 있어 영장을 발부하지 않고 즉시 이를 집행·처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계엄법 제13조는 "체포, 구금, 수색" 등에 관한 특별조치를 허용했다.
원용덕이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상대로 그런 경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험과 무관치 않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에 치러질 제2대 대선(1952.8.5.)에서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한 달 전에 불법 개헌(7.4.)을 저질렀다. 이 개헌을 위한 사전 작업이 5·25 비상계엄이다. 이런 불법적인 폭거에 가담해 국민을 위협하는 모습은 원용덕의 친일행위를 떠올리게 할 만했다.
원용덕은 의사 중에서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병원을 개업했다. 1931년에 병원을 개업한 그의 선행이 그해 10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강릉읍 임정(林町)에서 원용덕 씨가 경영하고 잇는 관동병원에서는 본월 1일부터 일반 환자를 동정하야 무료 진찰을 시행하는 동시, 약가도 종전보다 4할이나 인하한다 하며 의지 업는 사람들에게는 무료치료하야 준다는데 일반은 전긔(前記) 의사의 특지(特志)에 감사하야 마지안는다 한다."
이런 선행까지 베푼 그가 실제로는 지각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2년 뒤 증명됐다. 1931년에 일본군국주의가 자행한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가중되던 시기에 그는 일제의 만주 지배를 돕고자 병원을 청산하고 고국을 떠난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원용덕 편은 "1933년 만주국군 군의(軍醫) 특임으로 만주국군 제1교육대사령부에서 근무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의 철로를 고의로 폭파한 뒤 이를 중국인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만주를 점령했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우방인 영국과 미국이 볼 때도 사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영·미와 맞붙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만주사변이다.
만주사변의 그 같은 의의를 몰랐을 가능성이 낮은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개업의가 일부러 만주까지 올라가서 일본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이 됐다. 진찰료 무료, 약값 40% 세일의 파격적 선행을 무색게 하는 엉뚱한 선택이었다.
▲ 원용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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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아협회는 일본군 특무기관의 주도로 설치된 한국인 사상통제 기구였다. 2006년에 <한일민족문제연구> 제10권이 수록한 황민호 숭실대 강사의 논문 '만주지역 친일언론 재만조선인통신의 발행과 사상통제의 경향'에 인용된 흥화협회 회칙에 따르면, 이 단체의 최대 목적은 "재만(在灣)조선인의 사상선도"(제1조 제1호)였다.
원용덕은 만주 거주 한국인들을 통제하는 공안 분야에까지 가세한 친일 군의관이다. 1952년 비상계엄 포고문을 통해 한국 국민들을 위협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은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과도 맥락이 닿는다.
만주국은 일제 괴뢰국이었으므로 원용덕이 만주국 군대에 부역하고 받은 월급은 당연히 친일재산이다. 그는 이런 친일수익을 12년간 누리다가 만주국군 중교(중령)로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해 11월경 38도선 이남으로 월남한 그는 12월에 미군정청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이 되고 뒤이어 국방경비대 참령(소령), 경비사관학교장, 여단장 등을 거쳤다.
그는 그런 다음인 1952년 5월 25일 밤중에 발효된 문제의 비상계엄에 가담해 이승만의 집권 연장을 도왔다. 그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견인한 부산은 그 시절의 임시수도, 임시 서울이었다. 원용덕은 '1952년판 서울의 밤'의 장본인이다.
그 뒤에도 원용덕은 지각없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에게 일자리도 만들어주고 고급 차량도 제공했다. 2004년 11월에 <역사비평>이 실은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논문 '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대'는 "1953~54년 당시 그는 헌병총사령부 원용덕의 특별문관으로 매월 30만환의 기밀비를 받는 고급 정보원으로 원용덕의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한다.
1956년 1월 1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4년 12월에 서울 지역 쌀값은 가마니당 5190환이었다. 이 시절에는 월급으로 쌀 1가마를 받는 일도 흔했다. 원용덕이 안두희에게 매월 건넨 용돈은 근 60명의 서민이 월급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여기다가 지프차까지 내줬으니 백범 암살범에 대한 원용덕의 친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의 베풂은 선행이 아니라 악행이었다.
일제 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및 정부수립 뒤에도 계속된 원용덕의 악행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1953년에는 휴전을 막고 전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1954년에는 이승만을 배신한 뒤 재판을 받고 있던 극우 청년 김성주를 서울 신당동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살해했다. 그런 뒤 법원 판결로 사형이 집행된 것처럼 조작했다.
해방 전과 후를 관통하는 그의 악행에 대한 응징이 1960년 4·19혁명 뒤에 집행되는 듯했다. 이때 그는 구속되고 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을 받았다. 하지만 친일파 박정희가 그를 살렸다.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박정희 정권 때 특사로 풀려났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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