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준예산 사태 덮치나…탄핵 정국이 집어삼킨 '경제로드맵'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내년도 예산안부터 시작해 세법개정안, 경제정책방향 등 모든 경제 로드맵이 끝모를 불확실성에 빠졌다. 민생 회복을 위한 정책 대응이 시급한 상황에서 경제 컨트롤타워가 사실상 마비될 전망이다.
불확실성 장기화…준예산 현실화되나
당장 사상 초유의 ‘준예산’ 집행 사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야당은 오는 11일 임시국회를 소집해 다시 탄핵을 재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당분간 여야 간 정상적인 예산 논의는 쉽지 않다는 의미다. 헌법 54조 3항은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새해 1월 1일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할 경우, ▶국가 기관의 유지 및 운영 ▶법률상 지출 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한 사업의 계속 등을 위해 예산을 전년에 준(準)해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정 사상 준예산이 편성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는 만큼 혼란이 불가피하다.
설사 예산안이 연내 마련되더라도 야당 주도로 정부 주요 사업 예산이 대폭 삭감된 채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 앞서 야당은 정부가 제출한 677조4000억원 규모의 예산안에서 4조1000억원을 깎아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전액 삭감됐고, 야당이 ‘김건희 여사 예산’으로 지목한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예산도 대폭 줄었다. 정부의 정상적인 정책 수행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한덕수 총리는 8일 대국민 담화에서 "비상시에도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그 부수 법안의 통과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각 부처가 제때 집행을 준비해야만 민생경제를 적기에 회복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해온 각종 세법 개정안도 틀어막혀있다. 야당이 강하게 반대하는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등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물론, 여야가 사실상 합의한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유예 등도 안갯속이다. 금투세와 가상자산 과세 모두 소득세법 개정안이 연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당장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새해 경방 ‘맹탕’ 우려…朴때도 “시한부” 지적
연말연초에 실시되는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을 비롯해 신년 업무보고, 중앙부처 인사 등도 미궁 속에 놓여있다. 경제정책방향은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새해 경제 상황을 전망하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일정으로, 통상 매년 12월 중하순에 발표한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5일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내년도 경제정책방향도 차질 없이 예정대로 발표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탄핵 정국으로 중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어려워진 만큼 맹탕에 그칠 우려가 크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던 2016년 12월에도 기재부는 가까스로 12월 29일에 2017년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하지만 ‘기존 정책을 재탕한 수준’이라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노인 연령기준 상한 등 민감한 정책의 경우 정권이 바뀌는 이듬해 하반기에 논의하겠다며 미루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정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내실 있는 정책 방향을 설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동개혁 무기한 연기…트럼프 리스크도 손 놓나
저출생 고령화에 대응할 계속고용 등 노동 개혁도 ‘올스톱’ 상태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오는 12일 개최 예정이던 ‘계속고용 방안 마련 토론회’를 내년 1월로 잠정 연기했다. 당초 경사노위는 내년 초까지 정년연장 등 계속고용과 관련해 노사정 합의안을 내놓겠다는 계획이었지만, 탄핵 정국에 돌입하면서 기약 없게 됐다. 정부가 노사정 대화에 맞춰 준비하던 ‘계속고용 로드맵’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리스크’에도 제때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 취임 직후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물리고 중국에 10% 추가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미중 무역전쟁도 격화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한국 역시 영향권에 놓여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련된 핵심 의제들은 대부분 정상급 외교에서 조율된다는 점에서, 탄핵정국 장기화는 향후 한국경제에 깊은 주름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2기에 대응할 연말ㆍ연초 골든타임을 ‘계엄사태 후폭풍’에 날리게 된 셈이다.
이정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5일(현지시간) 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이 북러 군사 협력과 트럼프 관세 등 매우 심각한 지정학적·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지금의 정치 위기는 더 회복력 있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고 현존하는 국가 안보 위협을 완화할 수 있는 한국의 능력을 약화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협상 대상자끼리 반국가 세력, 동조자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여야가 평화롭게 테이블에 앉아 예산안을 협의할 상황은 아니다”며 “당장 시급한 민생 회복을 위해선 서둘러 정치적 불확실성을 없애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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