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가루 까맣게 덮인 아들... 그날 이후, 세상이 깨졌다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기자말>
[김미숙]
[이전 기사] 구미까지 덮친 데모의 열기, 19살에 처우개선 투쟁에 나서다
아들이 군을 제대하고 다녔던 대학에 복학 후 1년 뒤 졸업할 때였다. 아들은 취업을 잘하기 위해 스펙을 쌓느라 자격증을 여러 개 땄다. 1년 뒤 이력서를 넣어 사방팔방으로 면접시험을 보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천에 있는 회사 최종 면접에 정규직으로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출근 통보가 오지 않아 회사에 연락해보니 회사 증축이 무산되어 취업할 수 없다고 했다. 기껏 기다리게 해 놓고 취업을 할 수 없다니, 다른 일자리라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기서 태안 발전사를 소개해 주었다.
아들은 마지못해 입사하기로 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걱정스러웠지만, 모든 게 기밀이라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알 수가 없었고, 거리도 멀어 서로 왕래하기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2018년 9월 14일 아들은 정든 구미를 뒤로 하고 태안 서부발전 하청 한국발전기술에서 정해준 기숙사를 향해 떠나갔다. 기숙사 환경이 궁금해 동영상으로 확인 통화를 하며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때 나는 주야 일주일씩 맞교대를 돌며 일하던 상태라 출퇴근 시간에만 아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사흘이 지난 뒤 아들은 현장에 투입되어 주야 교대 근무 형태로 점검 업무를 맡아 일한다고 전했다.
세상에 버림받다
이날의 기억은 되새김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글 쓰는 작업은 면밀해서 초입에 들어서는 것조차 육중한 중압감으로 쉽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몇 번이나 용기를 내야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날도 나는 주간 근무가 끝나 퇴근하던 중이었다. 야간 근무에 들어간다던 아들이 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평소 같으면 곧바로 연락이 왔는데, 이날 따라 묵묵부답이었다. 잠자기 전까지 몇 차례 전화나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덜컥 겁이 나서 마음 졸였다. 그렇지만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더 못된 상상은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전화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아들이 집을 떠난 지 3개월도 채 안 된 2018년 12월 11일 이른 아침 6시 애 아빠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문자가 세 번이나 와있던 상태였다. 용균이 아빠가 급하게 나를 깨웠다. 아들이 일했던 지역의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는데, 아들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태안경찰서에 다다를 무렵 이번에는 태안의료원으로 곧바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태안의료원 로비에 들어서서 "김용균이라는 청년이 내 아들이고, 여기에 있다고 해서 급하게 달려왔으니 어서 찾아달라"고 하니, "그런 이름으로 들어온 환자가 없다"라고 한다. 인상착의를 얘기했더니, 한 사람이 "영안실에 들어와 있다"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영안실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실로 따라갔다. 서랍장 같은 것을 당기며 시신을 보여주는데, 몸은 비닐로 싸여있어 볼 수 없고, 얼굴은 석탄가루로 까맣게 덮여 있어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받다가 다시 확인하라며 돌려보냈고, 태안의료원으로 돌아와서 내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영안실에 들어갔다. 비닐로 싸인 신체를 보려 하자, 어떤 사람에게 급히 저지를 당했다. 그 사람은 "여기 들어오기 전 아들 상태를 따로 들은 것 없냐?"고 물었다. 내가 "들은 바 없다"라고 하자, "아들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다"라며 다른 부분도 훼손이 심해 보여줄 수가 없다고 강하게 만류했다.
▲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 입사 3개월만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 고 김용균의 생전 모습과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
ⓒ 김미숙 |
그런데 하청 이사와 함께 또 한 사람이 우리를 보며 인사하면서 "아들은 착하고 일도 성실하게 잘했는데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을 못 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고의 원인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말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죽었다는 얘기였다. 사고 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떤 근거로 아들의 잘못이라 말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12월 13일, 아들이 일했던 현장에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 궁금했고, 사건 해결 단서를 찾기 위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사고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석탄가루는 공장 전체에 눈처럼 쌓여있었다. 기계 한 대가 아파트 15층 높이였는데 전체 5층으로 되어 있었다. 5층까지 길게 컨베이어 벨트가 연결되어 올라가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석탄가루가 외부로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제로 외양을 만들어 그 안 중간에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석탄을 싣고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를 움직이는 물림점마다 수많은 회전체가 안전 커버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누구라도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죽음의 현장이었다. 그 안으로 몸을 반쯤 숙이고 들어가 떨어진 낙탄을 꺼내는 작업도 위험하긴 매한가지로 보였다. 이렇게 위험하게 일하게끔 만든 곳이 공공기관이라는 것도 너무 놀라웠다.
아들이 왜 사고를 당했는지 알게 되었다. 사고를 당한 장소 5층에 올라갔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폴리스라인은 없었고, 물청소로 이미 사고 현장의 증거는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현장보존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 가장 중요한 단서인데, 보존을 하기보다 사측의 불리함을 감추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나는 주먹을 힘껏 쥐고 아들의 죽음에 대해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다짐하며 악을 쓰며 울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내 울음소리는 사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한 맺힌 짐승 소리 같았다. 사람도 짐승같이 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다
▲ 고 김용균 추모 2차 범국민추모제 지난 2018년 12월 18일 ‘태안화력발전소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2차 범국민추모제’가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대책위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열렸다.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
ⓒ 권우성 |
2018년 12월 27일 어렵사리 산안법 전면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아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태안 빈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용균이 동료들은 모두 풀이 죽어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통과된 법안이 용균이 동료들을 살릴 수 없는, 용균이가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란다. 정부가 용균이와 나를 또 기만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 고 김용균씨 동료들 행진과 청와대 지난 2019년 1월 2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 장례식장 서울 이전 및 시민대책위 대표단 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열리는 가운데, 고인의 동료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행진하는 노동자들의 뒤로 청와대가 멀리 보인다. |
ⓒ 권우성 |
▲ 고 김용균씨 어머니의 눈물 지난 2019년 1월 22일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 김용균 노동자 장례식장 서울 이전 및 시민대책위 대표단 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권우성 |
4월부터 준비하기 시작해 2019년 10월 26일 사단법인 김용균 재단이 설립되었다. 재단을 설립한 건 아들을 기리는 것에 중점을 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보다, 비정규직 철폐와 청년노동자 권리보장 그리고 또 다른 유족들 지원을 통해 우리나라 노동안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었다.
이전에는 집과 회사만 다녔던 내가 갑자기 재단 이사장이라는 위치에 섰다. 대표 역할이 무엇인지 무지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크게 두려움은 없었다. 용균이 이름을 딴 재단인 만큼 우선 아들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 '일하다 죽지 않게!' 고 김용균 1주기 청와대 행진 2019년 12월 2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태안화력발전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1주기 추모 주간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참석자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 권우성 |
▲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지난 2020년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6일째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원청 기관장까지 기소된 아들의 사망 사건 관련 재판은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나, 2023년말 대법원에서 원청을 처벌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결국 원청은 처벌 대상에서 모두 빠져나갔고, 관행처럼 하청만 약한 처벌을 받게 됐다.
일하다 차별받지 않는 세상
지금 내가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노조법 2·3조를 개정하여 원하청 간에 교섭권을 만들고,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통해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여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함께 논의 중이다.
간혹 인터뷰나 강연을 하고 있지만, 가장 관심 두고 하는 일은 유족들과의 연대사업이다. 아들 사고 이후 그동안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깨졌다. 투쟁하면서 내 사고방식과 모든 관점이 달라졌다. '나'에서 '모두'로 바뀌었고, 모두의 삶의 질을 높여야만 개개인의 삶도 좋아짐을 알게 되었다.
▲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 |
ⓒ 이희훈 |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미숙씨는 김용균재단 이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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