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느슨하고 맹렬한 몸짓
교도관 출신 변호사라는 아주 심상치 않은 인물로 돌아왔습니다.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 첫 방송을 앞둔 기분은 어떤가요
제 경우에 촬영이 끝나면 그 인물을 빨리 털어버리는 편인데요. 촬영한 지 몇 개월 지나 작품 홍보할 시기가 되면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다시 들춰봐요. 당시 적어둔 메모를 일기처럼 보면서요.
지금 메모장을 한번 열어주세요. 뭐가 적혀 있나요
음…, 뭔가 많이 쓰긴 썼는데.
딱 봐도 길어 보이는데요(웃음)
연기에 대한 크고 작은 생각들이죠. 이번에는 제목에 캐릭터 이름이 들어간 터라 많은 걸 적었나 봐요. 작품은 혼자 찍는 게 아니잖아요. 저마다 호흡을 맞추며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게 중요한데, 이번 작품이 그랬죠. 그래서 저보다 다른 배우들과 호흡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모든 캐릭터가 다채롭게 살아날지, 더 자유롭게 서로의 것을 내놓을 수 있을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현장에 배우들 만나러 가는 재미가 컸어요. 매회 등장하는 재소자 역 배우들도 열정적이었거든요.
현장에서 동료들과 교감하는 고수만의 방법은
별거 없어요. 그저 자연스럽게 하던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죠.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보면서요.
작품 출연 결정이 빠른 편이잖아요. 이 작품은 얼마나 고심했나요
우선 저를 믿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크게 긴장하거나 힘들여 연기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유쾌하게 다루니까 오히려 툭툭 편하게 연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았어요. 다른 작품에서는 발음이나 발성, 캐릭터 설정에 더 세밀하게 신경 썼다면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은 힘을 빼고 접근하려 노력했어요.
가석방 심사관이라는 직업은 대중에게도 새로울 것 같습니다. 소재가 작품 선택의 이유가 되기도 했나요
그럼요. 이번 기회에 관심 있게 들여다봤어요. 재소자들이 만기 전 출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가석방이더군요.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 같은 거였어요. 그걸 심사하고 적격 여부를 판단하는 일을 해요. 일정 부분 감춰져 있는 직업이고, 비밀 서약이 필요한 부분도 있죠.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면이 필수겠지만, 그 이면에 또 다른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들여다봤어요. 이번 기회로 시청자들이 이 이야기를 접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이한신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넌 벌써 세상에 나가면 안 돼. 죗값을 다 치르지 않았거든.” 강인함과 집요함을 지닌 그의 어떤 면이 매력적이었나요
정의로운 친구니까요. 현실에서 매 순간 정의롭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가석방이라는 제도를 잘 활용하면 좋겠지만 이를 악용하려는 재소자들에게는 가차없는 반면, 억울한 이들에게는 도움을 주기도 해요. 연기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이 인간적으로 이해되지 않다가도, 또 어떤 이들에게는 속상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어요.
혹시 스스로 ‘석방’시키고 싶은 것도 있습니까
고민이 없으면 삶은 무의미하겠죠. 저는 어디에 그걸 털어놓거나 그에 빠져 허우적거릴 나이는 지난 것 같아요. 과거에는 어떤 생각에 충분히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면, 지금은 그런 고민 자체를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달라졌달까요.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죠. 걱정이 없으면 분명 삶은 건조할 거예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지니고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해요.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뿐 아니라 〈머니게임〉이나 〈방관자들〉 등 범죄 장르나 사회 이슈를 다룬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받기도 하나요
글쎄요. 어떻게 보면 짧게는 6개월 혹은 더 오랜 시간 그 인물로 살게 되면 캐릭터가 제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건 맞아요.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아요. 보통의 타인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좀 더 깊게 다가갈 뿐이에요.
2010년 영화 〈초능력자〉가 개봉할 당시의 〈엘르〉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데뷔한 지 10년, 무엇이 변했는지” 묻자 “난 인생의 키 높이가 크지 않은 캐릭터다. 성향도 거의 그대로인 것 같고. 예전엔 빨리 어른이 돼서 선배가 되고 싶었는데 요즘엔 바뀌었다. 형이나 선배 대접을 받으려는 순간, 고정된 생각에 내가 갇히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대로인가요
하하, 별걸 다 찾으셨네요. 저는 여전해요. 요즘에는 그런 고민조차 없어진 것 같은데요. 요즘 후배들은 재능이 많아요. 그들과 연기할 때 어떻게 접근하고 다가가는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새로운 면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되죠. 후배들과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때때로 후배들이 고민을 상담해 오면 어떤 얘기를 해주나요
보통 그저 듣는 편인데요. 그래도 꼭 하는 말은 대본을 많이 보라고 합니다. 뭘 하든 기본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10년이 더 흐른 지금, 변한 것에 대해 다시 물어볼게요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고. 변해야 될 건 변해야 하는 거고, 변하지 말아야 하는 건 어떻게든 변치 않고 남아 있죠. 새로운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켜야 될 건 무조건 지킵니다.
명쾌하네요. 배우 고수를 대하는 대중의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는 흐름이 재밌어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첫사랑 같은 존재이고, 누군가는 ‘고수 빼주세요’를 요청할 때 당신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죠. 최근작으로 당신을 알게 된 10대들은 여전히 ‘고비드’라고 부르죠
재밌어요. 저는 대중과 소통할 기회가 그렇게 많은 편인데, 앞으로 소통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여전히 이름을 검색할 때는 수고롭나요. “고수가 활동 안 할 때는 채소 고수가 대신 활동해 준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름에 관한 놀림이나 장난은 평생 들어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꼭 한 번씩 짚고 넘어가거든요. 데뷔하고 나서도 계속 이름에 대한 이슈가 있었는데 지금도 따라다녀요. 요즘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을 정도로...(웃음).
이름 얘기는 평생 따라다닐 것 같은데요(웃음). 요즘도 자전거를 타나요
그럼요. 자전거 여행을 자주 떠나요. 자전거를 탄 지 꽤 됐는데, 본격적으로 속도계를 달고 탄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라이딩의 매력은
이 자전거가 아니면 과연 내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장소가 주는 감성이죠. 해 질 때쯤 차분하게 바람 맞으며, 때로는 해 뜨기 전에 달리면 복잡한 생각이 이리저리 풀리는 것 같기도 해요.
어머니께서도 늘 “네 마음 편한 대로 해라”라고 말씀하셨다죠. 이 말이 삶을 선택할 때마다 큰 힘이 됐나요
배우 일이나 작품에 관한 얘기는 아니에요. 그저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있죠. 그럴 때 기준이 되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 편한 거잖아요. 물론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늘 여유롭고 고요해 보이지만 들끓는 면도 있겠죠
제 성격이 그래요. 예를 들어 지금 의자가 앞으로 쏠린다고 느껴질 때면 스스로를 뒤로 좀 기울인달까요. 속으로 어떤 것들이 곧 흘러넘칠 것 같아도 말이죠.
그런 유연함이 오래 사랑받는 비결 같기도 합니다
배우의 일이 안정적이지만은 않잖아요. 인기가 있든 없든, 인정을 받든 못 받든, 배우는 매번 노력하지만 늘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어요. 억지로 안정적이려고 하면 조바심이 커져요. 아랫배에 단단히 힘주고, 불안정한 면도 받아들이고 즐기는 게 방법이죠. 속이 시끄러운데 평온하려고 애쓰면 오히려 탈이 나요.
평생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은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바로 제 모습이요. 보다 성장한 모습도 볼 수 있을 테고요.
말하지 않아도 ‘그 모습’이란 것, 알 것 같습니다(웃음).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낼 건가요. 인생작의 이름을 빌려 묻자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날씨가 어떻든 집에 있으면 안 돼요. 크리스마스에는 무조건 밖으로 향하세요. 산책하거나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커피를 마시면서요. 어딘가 저도 있을 겁니다. 돌아다니다 서로 안부 인사도 나누면 좋겠네요. 그러니,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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